브런치 무비 패스 #1
나만 돌아왔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혜원은 시골에 심어진 아이다. 아빠의 요양 때문에 시골집에 내려왔지만, 엄마는 왜인지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도시로 올라가지 않고 시골에서 혜원을 키운다. 고등학생이 된 혜원은 도시에 있는 대학에 붙어 지루한 이 시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어린 혜원을 두고 어떠한 예고도 없이 혜원의 엄마가 갑자기 떠나버린다. 혜원보다 먼저 말이다.
혜원은 엄마가 곧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직감한다. 얼마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기 위해 혜원도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한다. 떠나면 모든 게 괜찮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냉혹했다.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하는 혜원은 공부할 시간을 쪼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밥은 편의점에서 팔다 남은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을 먹거나, 길거리에서 파는 컵밥으로 때워야 했다. 혜원은 늘 배가 고팠다. 허기가 졌다.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그 허기를 채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혜원은 힘들었던 도시를 떠나 시골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허기진 채로.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인생을 살기 싫다는 마음, 알 것 같다
다시 돌아온 시골집에서 혜원은 자신처럼 도시로 떠났다가 돌아와 농사를 짓는 재하와 도시로 가서 살고 싶어 하는 게 유일한 꿈인 은숙과 재회한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돌아온 혜원,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인생을 살기 싫어 스스로 선택해 돌아온 재하, 꿈만 꾸며 힘겨운 현실을 버티며 살고 있는 은숙. 이 세 명의 모습이 꼭 한 사람의 우리 같다. 열심히 공부해 들어간 대학을 어렵게 졸업해도 힘겨운 취업문이 기다리고 있고, 어쩌다 회사에 들어가게 되어도 삶이 좋아지기는커녕 새로운 고난과 역경으로 하루를 힘겹게 견뎌야 하는.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하느라 허기진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은숙의 말마따나 그만두고 말 수가 없어서 우리의 고민은 쌓여간다. 그런 우리에게 재하가 툭 던지는 말이 작은 바람을 몰고 온다.
"다른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는 없잖아."
사기나 잔머리 뭐 이런 게 없어서 농사를 '선택'했다는 재하의 저 말에 흔들리게 되는 건, 우리가 이미 저 말의 당연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아도 재하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회사를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인생을 살기 싫다는 마음, 그 마음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제철 음식이란 게 있다. 알맞을 때, 그때 먹어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알맞을 때를 기다리고 기다려야지만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걸 혜원은 엄마에게 배워 알고 있다. 혜원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키운 제철 곡식과 채소, 과일들로 맛있는 음식을 해먹는다. 모두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음식들이다. 맛있는 음식이 기분을 단숨에 좋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인 것처럼 혜원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과 나눠 먹고 계절의 흐름을 온전히 느끼며 마법 같은 1년을 보낸다. 그 사계절은 먹다 버린 토마토라 할지라도 양지바른 곳에서 햇빛을 듬뿍 받으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토마토처럼 혜원의 상처를 치유하고 잘 자랄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 된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이 돼?
사람에게도 알맞을 때라는 게 있을 텐데 우리는 종종 그때를 놓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바쁘다는 건 그때를 놓쳐버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된다. "미안, 바빠서" 혹은 "미안, 바빴어"라는 말이 잦아질수록, 사람들에게서도 나에게서도 내가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봄은 봄다워야 하고,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고, 가을은 가을다워야 하고,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고, 나는 나다워야 하는데... 바쁘게 사느라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나다운 게 무엇인지도 잊은 채, 그렇게 나를 잃어가며 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사계절을 모두 보내고 1년을 꼬박 채우며 천천히 자신을 찾아가는 혜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혜원과 동화된 우리가 잊고 있던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혜원이 보낸 시간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고, 그래서 어쩌면 금방 또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포기가 아니라 선택한 거야
농사에는 옮겨심기와 아주심기라는 게 있다. 모종을 튼튼하게 자라게 하려고 자리를 바꾸어 심는 것을 옮겨심기, 더이상 옮겨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 것을 아주심기라고 한다. 도시에서 시골로, 다시 시골에서 도시로 옮기며 허기진 날들을 보내야 했던 혜원은 어쩌면 튼튼하게 자라나기 위한 옮겨심기의 과정을 겪었던 건 아니었을까?
영화의 끝 무렵, 혜원은 다시 한번 도시로 떠난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제대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그런 혜원이 멀지 않아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녀가 옮겨심기를 끝내고 그곳에 아주 심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혜원의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아주 건강하고 튼튼해져 돌아온 그녀를 우리는 더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삶을 마음 속으로 깊이 응원할 뿐이다.
혜원이 가을에 거둬 말린 곶감을 먹으며 곶감의 맛으로 겨울이 깊어진 때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곶감의 맛으로 겨울이 깊어지는 때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깊어지는 때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그때, 우리도 혜원처럼 자신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으러 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눈으로 먹으며, 마치 푸른 숲에 잠시 들린 것처럼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내내 상쾌하고 행복했다. 섣불리 조언하거나 충고하지 않아서, 함부로 위로하지도 않아서 더 위로가 되는 영화. 다가올 봄이 기다려진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시사회 관람 후 적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리뷰.
이미지 출처: 영화 <리틀 포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