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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물 Mar 06. 2024

매움의 시작, 엄마손떡볶이

분식 중독자의 딸

엄마는 내가 아기 때 하도 안 먹어서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먹던 게 두 가지 음식이 있었는데 아이스크림과 소고기였었다. 엄마는 참 신기하셨다고 한다. 내 먹성이 엄마랑 너무나도 달라서 어떻게 이렀는지 궁금하셨다고 한다. 특히 엄마랑 동생은 과일 킬러인데 나는 과일에 별 신경 안 줬다. 그래서였을까 아직도 내가 사서 먹는 과일이 별로 없다. 특히 과즙 많고 까기 귀찮은 과일은 내 돈 주고 절대 안 산다. 내가 우리 가족으로부터 입맛 성향이 가장 달랐던 것은 나는 매운 음식을 못 먹었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오랫동안 김치도 씻어 먹어야 했고 오랫동안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동생은 엄마랑 할머니를 따라 한다고 정말 어린 나이부터 생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었다. 동생은 거기서부터 하나둘씩 매운 음식을 점령했다. 어린 나는 왜 매운 음식을 먹는지 이해가 안 됐다. 고통스러운 걸 왜 몸 안에 집어넣는지. 특히나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엄마랑 동생을 보며 오기가 생긴 건지 매운 음식을 더 꺼렸었다. 진라면도 무조건 순한 맛. 아니 솔직히 진라면보다 덜 맵고 꼬들꼬들한 스낵면이 더 좋았다. 거기다 신라면 좋아하는 사람은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었다. 근데 나는 안타깝게도 하루 세끼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분식 중독자의 딸로 태어났다.


아마 아빠 고등학교 시절 때부터인가 오래된 떡볶이집이 있다. 엄마손떡볶이. 오랫동안 갔던 곳이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명지대 앞 2층에 있어 포장해도 보통 아빠가 운전해 엄마가 내려 포장하던지 명지대에 주차하고 네 가족 다 같이 먹으러 다녔던 곳이었다. 난 매운 게 싫어서 집에 놓고 가달라고 부탁해도 아빠가 직접 떡볶이 어묵 국물에 씻어주시겠다고 다 먹고 인형 뽑기는 하러 가던지 문구점 데리러 가시겠다고 잘 설득하셔서 갔던 곳이었다. 오래전부터 명성이 얻었던 곳이라 방송에 나왔던 사진들이 식당 벽을 둘러쌌고 연예인 사인들도 종종 보였던 곳이었다. 우리는 보통 떡볶이 5,000원 어묵 2,000원 못난이 만두 2개 야끼만두 3개 김말이 4개 계란 2개 양 많이 달라고 주문했다. 이 매운 걸 먹어야 한다니. 이해가 안 됐고 만두나 김말이 하나나 두 개를 떡볶이랑 같이 섞이기 전에 따로 달라고 아빠 몰래 거래하는 법도 어린 나이에 배웠던 게 기억난다. 국물 떡볶이 스타일인 엄마손떡볶이는 젓가락질 서투른 어린아이에게 참 어려운 음식이었다. 쉽게 미끄덩하게 떡을 놓쳐 얼룩지게 만든 옷들도 꽤 많았고 아직도 젓가락질 못하냐, 덤벙대냐, 부모님에 혼나게 되며 떡볶이를 더 싫어하며 나 홀로 화풀이했던 것 같다. 노력해도 떡볶이는 힘들었던 음식이었다. 매번 도전해도 다시 어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엄마손떡볶이가 확장하며 이사를 했다. 딱 아빠한테 운전해서 들려 포장해서 가기 좋게 말이다. 이땐 내가 어느 정도 커서 날 심부름 시키기 좋은 나이가 되었었다. 거기다가 내가 다닌 초등학교도 5분 거리에 있어서 아빠가 토요일 내 학교 끝나고 가지러 오셔서 떡볶이 사 가는 최적화된 루틴이 생겨버린 거다. 맵다고 찡찡거리는 딸을 달랠 필요도 없고 인형 뽑기도 문방구로 거래할 필요 없이 말이다. 아빠와 나의 암묵적 규칙이었다. 아빠가 차로 픽업해서 학교 어땠냐고 물어보시면 쫑알쫑알 답하다 보면 엄마손떡볶이 앞이었다. 아빠는 꼭 많이 달라고 부탁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천 원짜리를 건네주셨다. 아빠의 대안 뇌물은 거스름돈이었다. 잔돈 남는 걸 용돈으로 쓰라고 주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별 불평 없이 떡볶이 주문해서 기다렸다가 검은 봉지에 받아 아빠 차로 다시 타고 집으로 갔다. 보통 엄마가 점심을 차리셨는데 아빠는 떡볶이를 메인으로 우리는 떡볶이를 반찬으로 먹었다. 나는 많이 먹으면 떡 두 개 아니면 어묵 두 개 정도 먹었었다. 그것도 항상 씻어서 먹었다.


다행히도 매운 음식을 못 먹는 게 미국 생활에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전형적 미국 음식 백인 음식은 정말 간도 심심하게 되어있고 후추도 맵다고 취급되는 곳도 종종 볼 수 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첫 8년 동안 한국에 못 나올 땐 엄마랑 동생은 더더욱 매운 음식 찾는 거에 힘들었던 것 같다. 스리라차 소스에 만족해야 했고 맵지도 않은데 맵다고 하는 음식에 만족해야 했던 시절도 많았다. 그러다 드디어 8년 만에 영주권 해결이 되어 우리는 한국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동생은 우리가 한국 갈 수 있게 된 사실을 알게 된 후 엄마손떡볶이를 무조건 첫 끼로 먹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8년 만에 한국에 갔을 땐 추억에 맛으로 먹었던 것 같다. 정말 잊을 수 없던 맛 떡볶이보단 어묵, 야끼만두, 김말이 위주로 즐겨 먹었다. 떡볶이 소스가 덜 묻은 떡, 어묵 잘 골라 먹었다. 아직도 매웠지만 쓸데없이 맵지 않은 미국 음식으로 다져진 한국인의 자부심을 늦었지만 가져 보기 위해 도전해 봤다. 8년 만에 먹은 귀한 추억의 맛은 값졌다. 미국에서 얼마나 메울지 마음을 졸여가며 블로그들을 찾아봤는데 처음으로 엄마손떡볶이에 카레 맛이 난다는 걸 알았고 그걸 이때 느끼게 되었다. 나름 뿌듯한 성장이었다.


대학생 1학년 때 불닭볶음면이 나왔다. 구 남자친구 현 남편한테 장난쳐 본다고 같이 만들어 먹었는데 정말 내생에 먹어본 것 중 제일 매웠다. 정말 매웠다. 절대 다시 안 먹어야지 하고 남자친구한테 넘겨주고 할인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문제가 생겼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워있는데 계속 불닭볶음면 맛이 생각나는 것이다. 미쳐서 미쳤어. 왜 그 매운걸. 다행히도 고등학교 때부터 워낙 수면 부족이어서 쉽게 잠들었고 아직도 머리가 평평한 표면에만 닿으면 보통 5분 안에 잠든다. 그다음 날 아침 날 수업 듣고 나서 점심시간이 되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불닭볶음면 생각이 나는 거다. 기숙사에 돌아와 컵라면 남은 거 하나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일부러 소스를 다 넣지도 않았는데도 쓰라리게 매웠다. 그래도 매운맛을 넘어서 다른 맛들을 음미할 수 있었다. 중독적이었다. 불닭 챌린지의 시작으로 하룻밤 사이 다른 매운 라면과 떡볶이를 찾아서 먹게 되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매운 음식 하나씩 도전하면서 도장을 깨듯 한 성취감을 느꼈다. 그 후 한동안 여름방학마다 한국에 나가면 할머니 집에 가기 전에 픽업해서 가는 게 엄마손떡볶이였다. 떡볶이를 즐길 줄 알게 된 나에겐 엄마손떡볶이로 여름 떡볶이 레이스 스타트가 되었다. 그 후 엽기떡볶이도 도전을 해보고 나 홀로 떡볶이 투어도 즐겨봤다. 시험공부하다 스트레스 풀려고 신라면도 먹는 어른이 된 것이다.


더 이상 엄마손떡볶이를 찾지 않는다. 굳이 거기에 갈 필요가 없는 건지 당기지 않는다. 더 자극적이고 맛있는 떡볶이들은 많아졌고 다정히 어묵을 씻어주고 내 어린 감정을 보살펴 주던 아빠는 더 이상 엄마손떡볶이에 없기 때문이다. 내 감정은 내가 돌 봐야 하는 나이가 되었고 아빠는 아직도 메뉴 선택권을 독재하고 이기적이다.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할 나이가 되었기도 하다. 그래도 매운 음식을 짧고 굵게라도 즐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떡볶이 대신 스트레스를 글로 풀어보자. 내 장 과 정신건강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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