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잤어? 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Ep. 3
두어 달 즈음 전에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전문가 인터뷰를 잡아야 했는데 문제는 언어였다.
인터뷰 대상은 중국인인 관계로 중국어로 진행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내가 중국어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부탁해야 하는데, 다 바쁠 텐데 남의 팀 일 도와달라고 하는 게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나보다 일 년 선배인 그녀는 흔쾌히 수락해줬고, 심지어 업체에서 번역해온 질의서를 본인이 다시 번역하고 재구성하는 노력까지 들였다.
그런데 인터뷰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연결이 문제였다. 중국하고 연결이 안 좋아서 10시에 시작해야 했던 인터뷰는 끊기고, 또 끊기고, 계속 끊기고. 결국 한 시간을 헤매다 차라리 얼른 점심을 먹고 오겠다고 내려갔다가, 겨우 식전 빵 한 입 넣었는데 갑자기 다시 연결이 되었다고 해서 뛰어올라가고. 나야 우리 팀 일이니까 고생하는 게 상관없지만, 남의 팀 일 도우러 와서 고생을 하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미안해하는 나에게 그녀는 이렇게 같이 고생해서 더 친해지는 거 아니겠냐며 웃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인터뷰 후 우리는 곧 같이 식사하자고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휴가에서 복귀한 후 우리는 드디어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되었다. 회사 근처에 그녀가 좋아하는 샐러드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나 주문을 하고 자리로 돌아온 순간까지도 나는 그저 대부분의 점심이 그렇듯 회사 생활에 대한 한풀이 같은 얕은 근황을 나누고 샐러드만큼이나 가벼운 마음으로 헤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예상 시나리오를 벗어난 걸까.
그녀가 말했다. 올봄에 심하게 아팠다고. 응급실에 실려가서 몇 주 병가를 내야 할 만큼 심하게 아팠다고. 가족이 외국에 나가 있는터라 수술 동의서에 본인이 직접 사인을 해야 했는데 너무 서러웠다고. 그런데 몇 주 회사를 쉬고 돌아오니 그 사이에 이직하러 면접보고 다닌 거 아니냐며 도는 소문이 더 서러웠다고. 그러고 그녀는 내게 물었다. 희원씨는 괜찮냐고. 사람들이 다 다음 퇴사자가 희원씨라고 떠들고 다니는데, 그런 소문은 가볍게 무시해도 된다고.
내게 그런 소문은 (가능성이 있기도 하니) 의미가 없지만, 맞아요, 쉽지는 않았어요. 안 쉬웠어요, 분명. 그래서 제가 너무 힘들었던 올여름의 어느 날,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제 방 한 구석에서 핸드폰 메모를 켜고 "이곳에서 행복했던 기억"이라는 제목을 달고 적어보기 시작했거든요. 입사 첫날로 거슬러 올라가 첫날, 둘째 날, 셋 째날 기억을 하나하나 돌아봤단 말이에요. 그냥 적당한 행복 말고, 내가 정말 정말로 이곳에서 행복했던 순간들 있잖아요. 이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한 순간들이었기 때문에 행복했던 기억들. 그런데 하나둘 적어 내려가다 보니 13가지나 나온 거예요! 13가지!
그 순간들이, 막 엄청난 순간들은 아니에요. 그냥 정말 사소한 기억도 있고, 잠시 스쳤던 찰나 혹은 누군가 지나가며 건네주었던 "밥 먹었어?"와 같은 한마디 있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그때가, 정말 안 좋았던 시기를 지난 직후였어요. 그냥 마음이 많이 찢기고 멍들어있던 상태로 새로운 팀으로 가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는데, 에이전시를 끼게 되면서 계약서 작업을 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좀 버벅댔어요. 그래서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다시 수정하고 그랬거든요. 아무래도 총무팀이 다가가기 힘들긴 하니 평소에도 눈치를 되게 많이 봤는데, 그런데 담당하시는 책임님이 싫은 내색 하나 없이 하나하나 봐주시면서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러고 며칠 후인가, 오전에 계약서 작업을 마무리하고 팀 방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팀장님이 (계약서를 봐주신) "안책임님이시네" 하고 복도를 쳐다보시더라고요. 저는 그분 하고 통화만 해서 얼굴을 뵌 적은 없거든요. 혹시 오전에 뭔가 작업이 잘못되어서 직접 찾으러 오셨나 하고 뛰어나가 "책임님!" 인사드리고, 제가 최희원입니다, 오전에 보내드린 계약서에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 하는데 아니라고, 다른 일로 올라온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직 회사 시스템을 잘 몰라서 계속 실수해 죄송하다고 하니까 책임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처음인데 당연하지."
처음인데 당연하지.
처음인데 당연하지...
처음인데, 그래 처음이니까,
그러니까 당연하지...
저는 그렇게 인사드리고 자리로 돌아와 잠깐 멍하니 앉아있다가, 결국 화장실로 가 울고 말았어요. 처음이어도 당연하지 않은, 항상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해왔고 솔직히 나도 그 말에 동의해왔거든요. 학교도 아닌데 처음부터 잘하길 요구받는 게 당연하다고. 그래서 내가 버벅대고 잘 못하면 그건 회사에 폐를 끼치는 거라고 그렇게 나 자신을 나무라고 또 나무라 왔는데...
근데 처음이니까 당연하다고 말씀해 주시니까, 그러니까 순간 내가 무너져버린 거예요. 그 책임님처럼 오래된 분이면 너무 당연한 작업이니까 상대방이 새로 왔든지 말든지 잘못해서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게 귀찮으실 텐데, 근데 그게 당연하다고 해주셔서. 그냥 딱 그 두 마디, 딱 그 두 마디와 죄송해할 필요 없다는 눈빛. 텃세가 있는 직장으로 오면서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늘 한편으로는 죄인처럼 살고 있었는데 괜찮다고 해주셔서.
"그 마음이 뭔지 알아요."
그녀는 오래된 불면증으로 인해 괴로웠다고 했다. 누워서 출근할 때까지 잠에 못 드는 게 너무 흔해서, 피곤한 채로 회사에 출근하고 밤에는 또 잠에 들지 못하고.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 팀장님하고 점심을 먹다 우연히 자신의 상황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고 그다음 날, 여느 날처럼 출근해 팀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으려 하는데 그날은 팀장님의 인사가 평소와 달랐단다.
"잘 잤어?"
나는 샐러드를 먹다 말고 잘 잤어? 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무슨 대단한 말이어서가 아니에요. 그냥, 그냥 참 평범한 말인데, 아무리 평범한 말이어도 내가 힘들어하던 짐을 톡 혹은 툭 건드리면 마음에 울림이 있는 거 같아요."
그냥 정말 평범한 말이거든요.
"밥 먹었어?" 같은 말 있잖아요.
"처음인데 당연하지"도 "잘 잤어?"도 정말 평범한 말인데
그게 큰 울림이 있는 거예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말들은 어쩌면
정말 평범한 말들일 수도 있어요.
앞에서 애써 흐르는 눈물을 멈추려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희원씨는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희원씨가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따뜻함을 알아보는 거예요. 따뜻함은, 내가 추구하는 모습이지만 감히 현재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나는 차갑고 냉정하고 때로는 꽤나 모질기도 한데 내가 따뜻한 사람이라니.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희원씨는 이미 2021년을 의미 있게 살았다고. 나의 2021년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너무나 의미 있었던 것 같다고.
"저는 꽃을 선물할 일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가진 꽃을 찾아 선물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메리골드예요."
"메리골드? 메리골드의 꽃말은 뭐예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그날 회사로 돌아와 메리골드를 본 적 없다는 그녀에게 사진을 찾아 보내니 그녀가 답했다.
반드시, 메리골드처럼 반드시 행복이 오고야 말 거라고.
반드시,
반드시 행복이 오고야 말 거라고 말해주어서
그녀가 내게, 반드시 행복이
오고야 말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어서
그날 나는 잘 잤어? 와 반드시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