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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영 Oct 12. 2024

규칙은 몰라도 서사는 안다

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22

01 . 

어느덧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이 플레이오프 경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응원하는 팀은 일찌감치 떨어졌기 때문에... 맘 편히 지켜보고 있습니다만) 올해 1,000만 관중 열풍을 일으킨 프로야구 시장은 가을야구 잔치에서도 그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게 속속 증명되고 있어 저 역시 즐거운 마음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02 . 

정규 시즌이 끝난 이후로는 유독 올해의 야구 열기를 조명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엔데믹 이후 관중 증가는 이미 예견된 부분이긴 했지만 시즌 시작 때만 하더라도 올해 1,000만 관중 돌파를 점치는 곳은 거의 없었거든요. 게다가 20대에 해당하는 젊은 관중의 새로운 유입이 야구 종목 전체에 큰 활기를 불어 넣었고, 슈퍼스타급 신인들과 깨지기 쉽지 않아 보였던 신기록들이 속출하며 말 그대로 프로 리그 출범 이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게 객관적으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03 . 

물론 올해 프로야구 흥행에 관한 이유를 분석한 자료는 많습니다. 자동 스트라이크-볼 판정 시스템인 ABS 도입으로 심판 판정 논란이 줄어들었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고, 3위부터 6위까지의 팀 순위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엎치락뒤치락 하며 박진감을 더했다는 평도 있죠. 

하지만 야구를 조금이라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마 금방 눈치채실 겁니다. 이런 작은 변화 요소에 크게 요동칠 팬들이 아니며, 피 말리는 순위 경쟁은 사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아니고서야 큰 의미가 없기에 리그 전체에 타격감을 줄만한 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04 . 

당연히 저도 야구 전문가가 아니니까 괜히 아는척하며 분석가 코스프레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나름 한 가지 이유를 보태보자면 딱 하나 거론하고 싶은 요인이 있습니다. 바로 '최강야구' 신드롬이죠. 2022년 6월 첫 방송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초기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사실 올해 들어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강야구 직관 열기는 상상을 초월하며, 출연하는 선수들 역시 현역 시절보다 더 많이 사랑받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시청률 무덤 시대에 종편 기준 4.4% 달성했다는 것도 어마어마한 수치죠.)


05 . 

실제로 제 주변에서 야구 이야기가 주제로 등장하면 이런 대화가 오고 가기도 합니다. 


"혹시 야구 보세요? 아니면 응원하는 팀 있으신가요?" 

"아뇨. 저 야구는 안 보고 그냥 '최강야구'만 봐요."


문장만 떼놓고 보면 좀 이상하다 싶지만 프로야구와 최강야구와의 관계를 아시는 분들께는 사실 그리 어색한 대화도 아닙니다. 저만하더라도 야구 관련한 알고리즘에 뜨는 쇼츠들은 '최강야구' 하이라이트이거나 올해 티빙에서 시작한 '야구대표자'라는 프로그램의 어록들이 대부분이니까 말이죠. 


06 . 

그럼 왜 최강야구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지, 그리고 그 인기가 어떻게 프로야구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 어렵다는 젊은 세대의 감성은 어떻게 건드렸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에 대한 답을 '서사'에서 찾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최강야구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서사들이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 야구에 대한 흥미가 식어가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의미죠. 야구에 관한 규칙은 몰라도 플레이어들의 서사를 알게 된 이상 이 매력을 지나치기는 힘들었던 겁니다. 


07 . 

저도 최강야구를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들은 모두 선수들 간의 대화에서 발견했습니다. 실제 선수들이 출루했을 때 1루수와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지, 덕아웃에서 외치는 응원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는지, 같은 팀 투수가 고전을 면치 못했을 땐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경기 전후 라커룸에서는 어떤 분위기가 이어지는지, 심지어 감독과 코치는 선수를 따로 방에 불러 무슨 말을 해주는지 등이 생생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이른바 스탯이라고 표현하던 수치로 선수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이제 그 선수가 가진 개인적인 서사로 한 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죠. 


08 . 

그 정점은 얼마 전 최강야구의 유태웅 선수가 육성선수 신분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된 데서 최고 피크를 찍었습니다. 프로의 부름을 받지 못해 최강야구에서 새롭게 야구를 시작한 선수가 좋은 활약에 힘입어 다시 프로에 도전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야구 만화에 등장할 법한 청춘 성장물에 가깝거든요. 때문에 고교 신인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이나 내년 FA 신분 선수들의 물밑 이적 소문에 앞서 유태웅 선수의 기사가 가장 주목받은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09 . 

'평가는 기록으로 하지만 사랑은 서사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 말 역시 MLB의 전설적인 도루왕이자 해설가였던 모리 윌스가 남긴 어록입니다. 1962년 한 시즌 100개 도루를 달성할 당시 사람들이 라디오 중계에 귀를 기울인 채 자신이 도루할 때면 같이 뛰는 동작을 취하는 걸 보고 남긴 말이라고 하죠. 그러니 그는 일찌감치 '잘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 . 

올해 1,000만 관중 요인을 조명한 기사에는 이런 분석도 있었습니다. '고물가 시대에 주머니가 가벼운 20대 청년들이 2만 원도 안되는 돈으로 3시간을 놀 수 있다는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뭐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으니 덮어놓고 부정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글쎄요... 요즘의 젊은 세대가 그런 단순한 요인으로 이런 열기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저는 오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돈 만 원이어도 의미와 재미가 없다면 거들떠보지 않고, 수십만 원을 호가하더라도 의미와 재미만 있다면야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는 세대를 너무 쉽게 본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특정한 포인트를 큰 결과와 연결하고자 하면 늘 오류가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사는 포인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 전체에 녹아있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 역시 부분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 그 자체이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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