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문단으로 전하는 짧은 생각 : 열문단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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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심리학에 관련된 책을 좋아해서 매해 4-5권 정도는 의도적으로 심리학 도서를 선정해 읽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엄청난 깊이와 이해를 요구하는 그런 책들은 아닙니다... 미리 말씀드리고 시작하려고요...) 그런데 심리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의외로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 정말 참고할 만한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이용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뇌과학과 연결된 이야기, 생물학적 본성에 근거한 이야기에 주목하다 보면 과학과 비과학(?)의 어느 지점에서 밸런스를 잡고 있는 기획 혹은 브랜딩 영역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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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저는 '제 1 연상'이라는 개념이 가장 흥미롭고도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제 1 연상이란 말 그대로 우리가 특정한 대상을 인지할 때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첫 번째 이미지를 뜻합니다. 즉 '뉴욕'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지금 여러분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느낌적 느낌이 바로 제 1 연상에 해당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 연상 작용은 우리가 흔히 아는 첫인상이나 고정관념과는 조금 다른 역할을 합니다. 첫인상은 대부분 일방적 정보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가 손쓸 틈 없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반대로 고정관념은 어떤 근거나 믿음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신념이기 때문에 또 좀 특성이 다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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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연상의 가장 큰 특징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잠재의식이나 기저 속에서 여러 가지 사고 행동에 영향을 주고, 심지어 우리의 감정과 육체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주목받는 '저속 노화'라는 단어를 떠올려 봤을 때 누군가는 한 건강 정보 프로그램에서 나이 지긋하신 전문의 선생님이 우리의 몸 상태를 지적하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에이징(aging) 자체를 거부하는 마치 영생을 꿈꾸는 듯한 다소 급진적인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다는 거죠. 사람마다 사고체계와 경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이지만, 역순으로 이 각각의 장면들을 저속 노화라는 단어로 묶는다고 상상해 보면 이제 문제는 굉장히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하나의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그 간극이 크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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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 1 연상이 일과 연관성이 크다고 판단한 부분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흔히 제 1 연상이 새로운 연상으로 대체되기 위해서는 3가지 중 하나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심리학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 첫째는 바로 '경험'입니다. 기존의 연상 위에 새로운 경험이 입혀지면 가장 최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연상으로 업데이트될 가능성이 높은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뉴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제 1 연상은 다시 뉴욕을 방문하고 왔을 때 교체되어 있을 확률이 가장 큽니다.
두 번째는 '훈련'입니다. 제 1 연상이라는 존재를 인지하게 된 이상 조금의 노력을 더 기울여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키워드들에 대해 각자가 원하는 연상을 입히도록 끊임없이 연습한다면 실제로 연상되는 이미지가 바뀐다고 하거든요. 마치 운동을 통해 특정 부위가 강해지도록 하는 것처럼 심리 기제도 단련할 수가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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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강도(혹은 빈도)'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 머릿속에 자리한 시각적 요소를 밀어낼만한 더 큰 임팩트의 무엇이 다가온다면 기존에 있던 녀석들도 금세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최근에 가장 많이 노출된 이야기들에 영향을 받아 조금씩 밀려나는 경우도 있죠.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들으면 비교적 최근에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전쟁 관련 국가나 이벤트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러니 제 1 연상은 어떻게든 우리 삶의 경험, 훈련, 강도(빈도) 등과 깊은 연관이 있는, 어쩌면 삶의 지문 같은 거라고 볼 수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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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른바 '아이디어가 고갈됐다', '창의성이 결여됐다', '새로운 생각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라고 판단하는 순간이 바로 이 제 1 연상이 너무 오래 굳어진 경우라는 겁니다. 분석심리학의 기틀을 세운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특히 이 분야를 심도 있게 들여다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융은 인간이 너무 쉽게 제 1 연상을 규정하거나 그렇게 규정된 이미지를 오랫동안 교체하지 않고 있으면 개인적인 생산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생각을 계속 수혈해야 하는 직군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본인의 제 1 연상을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의도적으로 교체하는 작업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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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융을 포함한 여러 학자들은 제 1 연상을 대체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 즉 '훈련'의 방법으로 '읽기'와 '쓰기'를 강조했습니다. 이 두 요소만큼 생각의 생산력에 중요한 운동법을 찾기도 힘들다는 게 그 이유였죠.
우리는 글이나 책을 읽을 때 어떤 식으로든 연상과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저자의 의도와 맥락을 따라가며 특정한 키워드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순간, 마치 카드패를 섞을 때처럼 우리가 갖고 있던 제 1 연상들이 자동적으로 섞이고 재배치되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하죠. 그게 우리 뇌를 말랑말랑하게 해주고 새로운 생각들을 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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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는 더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글로 쓸 때 사람은 누구나 가장 효과적인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특정한 키워드에 특정한 이미지들이 정리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읽기가 카드를 섞는 작업이었다면 쓰기는 그 카드 중에서 가장 좋은 패들만을 골라 최상의 조합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읽기와 쓰기에 특화된 사람은 이 일련의 작업을 거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생산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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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읽고 쓰기를 강조하기 위해 빌드업친 게 아니냐'고 하실 수 있지만,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읽고 쓰기를 그저 취미로만 할 게 아니라 내가 하는 업무를 위해서라도 더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꼭 기획이나 브랜딩 분야가 아니라고 해도 요즘처럼 질문이 중요한 시대에는 내 질문이 어느 부분을 어떻게 건드리기 시작하냐가 핵심 중의 핵심인데 이때 내 머릿속에 늘 똑같은 카드만 들어있다면 매우 불리한 게 사실이죠.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의 옵션을 확보하기 위해서 읽고 써야 한다면 이만큼 확실한 동기부여가 또 어딨나도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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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이제 머리가 굳어서 새로운 생각을 잘 못해'라는 말도, '한창 반짝반짝할 때니까 그 눈으로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펼쳐보세요'라는 말도, '나는 이제 제 1 연상을 교체할 의지도, 역량도 없습니다'라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위와 연차, 나이와 경험을 모두 마다하고 각자가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사고 훈련을 해야 하는 게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가는 생산 인구들의 의무가 아닐까도 싶고요.
그런 의미에서 어느덧 저무는 한 해, 얼마 남지 않은 12월에 새해 목표와 포부를 건드리기 앞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내 머릿속에 자리한 어떤 제 1 연상들을 새롭게 업데이트해보고 싶은가?'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자연스럽게 머릿속 카드패를 섞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니까요, 새해에는 조금 더 생산적인 뇌를 만드는 노력을 해보는 것도 꽤 의미 있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