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밤토끼 Apr 12. 2022

도시락의 부활(2)

도시에서 리틀 포레스트처럼

벌집, 뱀, 보라색 도라지꽃, 오래된 아궁이, 생기 없는 툇마루. 오래된 기억 속 시골집 풍경은 황폐하고 황량했다. 시골집의 이미지가 그러한 것은 아빠 세대에 벌어진 이촌향도의 흔적이었다.


내가 어릴 때 시골집 앞마당과 뒷밭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와 온갖 잡초가 가득했다. 집은 비워져 있는 시간이 길었으므로 사람의 것이 아닌 시간이 더 길었다. 집 주변에서 종종 뱀을 봤고(아빠는 이걸 아무렇지 않게 잡아서 풀숲에 던졌다), 낡은 지붕에는 커다란 벌집이 달려있기도 했다. 집 뒤에 딸려있는 밭은 밭으로써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보라색 도라지꽃은 재배하지 않은 야생의 것이었다. 아궁이가 있는 오래된 부엌은 나무 뗀 냄새가 깊숙이 베여 부엌에 들어간다는 것보다 냄새 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무로 된 툇마루는 물걸레질을 해도 물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건조하고 생기가 없었다.


물론 좋은 기억도 꽤 많다. 하천에서 했던 물놀이라던가 개구리 잡기 같은 것들.


나와 오빠가 혼자 있어도 되는 나이가 되자 부모님의 시골집 방문은 점점 늘어났고, 시골에 다녀올 때마다 자동차 트렁크에는 여러 가지 채소가 가득했다. 그걸로 엄마는 반찬을 했다. 정말 시골에서 온 시골밥상이었다.


몇 년 전부터는 부모님이 부산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시골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봄에는 씨 뿌리고 모종 심느라 바쁘고, 여름에는 물 주기 바쁘고, 가을에는 수확하기 바쁘고, 겨울에는 김치 담그느라 바쁘다.  

시골집은 수년 전에 보수하여 황폐하고 황량했던 모습은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창고를 보며 아빠의 다른 면모를 알게 되었다.
시골집은 이제 사람과 야생의 것이 되었다. 키우지 않는 촌냥이들은 집 어디에나 늘어져 있고, 집 어디엔가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시골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텃밭의 품종은 계절마다,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어느새 엄마의 자부심은 땅에서 나는 대부분의 것은 돈 주고 사 먹지 않는다는 것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엄마 보따리가 도착하면 나의 일도 시작된다. 엄마 보따리의 크기는 나의 노동량과 비례한다.


계절마다 보따리의 내용물이 달라지다 보니 엄마 반찬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나도 꽤 다양한 반찬을 만들게 되었다. 원천이 엄마 보따리이니 나의 반찬이 엄마의 반찬을 닮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봄 보따리


봄과 여름에는 나물이 많이나 엄마 보따리가 유독 풍성하다. 봄에는 정구지(부추), 쪽파, 풋마늘, 대파, 표고버섯, 두릅, 엄나무순, 상추, 시금치, 곰취 등 정말 온갖 것들이 신문지에 돌돌 말려 택배 상자에 들어가 있다. 나는 정구지찌짐(이건 이렇게 말해야 더 맛있게 느껴짐)을 유독 좋아해 질릴 때까지 만들어 먹는다. 때로는 고춧가루를 넣어 무쳐먹기도 한다. 엄마 말에 의하면 정구지는 베고 돌아서면 쑥 자라 있기 때문에 보내오는 양이 어마어마하다. 두릅과 엄나무순은 데쳐서 초장에 찍어먹고, 시금치는 나물로 만들어 먹는다. 시금치도 보내오는 양이 꽤 많은데 우리 집에는 시금치 귀신(남편)이 있어 아껴먹을 정도다.

시골집 앞마당에서 자란 야생 달래는 달래장이 되었다. 얼마전 보내 온 풋마늘은 장아찌가 되었다. 엄마밥상의 장아찌를 그렇게 탐탁치않아했는데 장아찌를 만들고 있는 나라니...


여름 보따리


여름은 봄의 것과 조금 다르게 풍성하다. 대체로 열매들이 온다. 상추와 부추는 봄에 이어 ing 상태이고, 감자, 양파, 고추, 조선 오이, 애호박, 토마토, 자두, 오크라, 열무김치 등이 도착한다. 나는 열무김치를 넣은 비빔밥과 비빔국수를 정말 정말 좋아해서 여름만 되면 엄마의 열무김치를 기다린다.

텃밭에서 기른 방울토마토. 그냥 먹어도 될 것을 작년에는 선드라이드 토마토로 만들었다. 선드라이드 토마토는 파스타를 할 때 넣기도 했고 간단한 술 안주로도 먹었다.
시골집에는 오래 된 자두 나무가 있다. 자두가 도착하면 땀을 흘리며 자두잼과 리코타치즈를 만든다. 바게트에 발라먹는 자두잼과 리코타치즈는 나에게 여름맛의 상징이다.
일본에서 먹었던 오크라 때문에  마르쉐 씨앗농부에게 사서 엄마에게 주었다. 덕분에 엄마가 키운 오크라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고 엄마에게서 욕도 함께 먹었다.  

 

가을 보따리


가을에 보내오는 것은 감(대봉과 단감), 고구마, 콩, 표고버섯 등이 있다. 감은 박스채 보내오므로 주변 사람들과 나눠먹을 때가 많다. 콩은 밥을 지을 때 넣어 먹거나 콩자반으로 만들어 먹는다. 아주 가끔은 늙은 호박을 긁어서 보내온다. 내가 늙은 호박전을 좋아하기도 하고 늙은 호박전 못 먹어 본 사위 먹이라고.

채식주간(매월 일주일만 실천)에 만들어 먹는 버섯전골. 여기에 엄마가 키운 표고버섯을 넣어 먹는다.


겨울 보따리


겨울은 겨울인 만큼 엄마 보따리에 채소는 줄어든다. 하지만 겨울에는 김장김치라는 존재가 있다.  독립 전에는 김장김치를 할 때 보조역할을 하며 양념 바른 배춧잎을 한 장 한 장 뜯어먹곤 했다.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김장김치를 한 일주일 동안은 생김치만 먹었다. 작년 겨울에는 엄마가 김장김치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보쌈을 했다.


사계절 보따리


참깨, 참기름, 들기름, 고춧가루, 매실청, 국간장, 고추장, 된장 등은 계절과 상관없이 보내온다. 내가 만드는 집밥은 모두 엄마가 보내주는 것으로 만든다.


정말로 나는 엄마 덕분에 먹고살고, 엄마 덕분에 서울에서 리틀 포스트처럼 산다. 이런 것을 보면 나의 도시락은 부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락의 부활(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