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최 Jun 08. 2023

헤어질 결심, 함께할 결심.

부부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저희 부부는 '달과궁한의원'이라는 작은 사업체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의사고, 배우자는 대기업 재무팀에서 오래 일한 재무전문가입니다. 전문가였던 저와, 경영대 출신의 제너럴리스트 남편. 뭐랄까 성공한 스타트업의 IT 기술자과 전문경영인의 조합처럼 근사해 보였어요. '우린 멋져.' 그런 자신감에 약간 취했었던 것도 같습니다.


뭐가 됐든 자영업을 꿈꿨던 시절이었습니다. 월급쟁이에게 미래가 있을까, 우리는 종종 그런 화제를 안주 삼곤 했습니다. 미친 서울의 집값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 먹으면서 살고 싶다. 소박해 보이기도 대단해 보이기도 하는 삶의 목표를 두서없이 늘어놓던 저녁이면 아, 우리는 결국 우리의 사업을 시작하겠구나, 막연하게 생각했지요. 


시간이 더 있었다면 한의원이 아니라 뭐라도 했을 거예요. 다만 뒤늦게 한의사가 된 만큼 빨리 원하는 진료에 집중하고 싶었던 제가 개원의 운을 띄웠고, 남편이 지체 없이 합류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동행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해에 우리는 10년 연애에 결혼한 지 만 5년 차였습니다. 


도합 15년이면 상대를 알만큼 알았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워낙에 서로 접점이 없는 성격이라 트러블이 예상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잘 알기에 우회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서로의 단점만큼 장점을 잘 알기에 그 조합이 또 기가 막힐 수 있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서로에게 눈이 멀어, 같이 일하기만 하면 모든 게 잘될 거라 믿었던 것 같습니다. 관계의 시작이라는 게 다 비슷한가 봐요. 콩깍지 제대로 씐 연애 초기에는 서로의 단점이 보이지 않지요. 


삐져나온 코털은 소탈해 보이고 욱하는 성격마저 박력 있어 보이던 시기는 언젠가는 (생각보다 빨리) 끝납니다. 관계도 건강하게 나이를 먹으려면 '제발 코털은 깎고 욱하는 성질은 좀 죽여!'라고 말하게 되는 시간들을 잘 넘겨야 하잖아요. 이 시기를 넘기지 못하고 '예전에 넌 안 그랬어, 얼마나 날 좋아했는데!!'라는 생각에 매달려 있으면 그 관계의 수명은 거기서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또 콩깍지가 씌지 않으면 연애는 시작조차 안 하게 될지 모릅니다. 결혼도, 동업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좀 더 합리적이었다면 (그래서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예상했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 힘든 길을 굳이 가게 만드는 콩깍지 요정의 장난이 있기에 어떤 역사들은 또 쓰이는 겁니다. 




     함께 일을 시작한 후에 우리의 관계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딸만 넷인 집에 막내로 태어나 한 번도 메인 자리에 서 본 적이 없는 깍두기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뼛속까지 인프피에 덕후의 기질이 다분한 집순이입니다. 그에 반해 K-장남이자 눈에 띄게 예쁜 아기였던 남편은 태어난 순간부터 센터를 놓친 적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존감 킹으로 자랐고 어떤 자리에서든 주류이자 리더의 역할에 익숙했던 사람이지요. 


저는 우리 사업의 대표이자 핵심 역량이지만 그 자리가 부담스럽게 느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남편은 어디서든 주류였는데 지금은 백업을 담당하는 스스로가 답답하고 어색하다 말하곤 합니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인프피인데 새로운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야 하는 프런트맨 자리에 있는 저와, 회식자리마저 즐거운 외향형 인간의 전형이지만 동료도 상사도 없이 혼자 일하는 데에 익숙해져야 하는 남편은 각자의 이유로 괴로워하며 때로는 서로의 자리를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타고난 천성을 거스르는 일에 맞춰가는 과정은 뼈를 잘라 맞추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일로 다듬어진 어떤 부분은 나의 성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었다면 결코 개발되지 않았을 가장의 존재감과 리더의 책임감을, 저는 어느새 탑재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몇 시간씩 닥치고 굴속에 처박히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을 멈추지 않는 삶의 무게가 이제 그리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남편에게도 이 사업이 성장의 기회가 되었을까요? 부디 그렇기를 바랍니다. 




    동업하면서 부부로서의 관계가 위협받기도 했고, 부부여서 함께 일하는 과정에 탄력을 받기도 했습니다. 콩깍지 요정이 떠나가고 난 자리에 남아 서로에게 포탄을 날려대던 전쟁의 시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휴전의 협정을 빠르게 맺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제 조금 덜 싸웁니다.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절대 그만두지 않을 동료가 있어서 든든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마치 처음 연애할 때 영원히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서로의 연한 부분을 도려내며 싸워댈 때면 '와, 이건 정말 안 되겠다' 싶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더 큰 어떤 것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이 관계를 끝낼 수도 있다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 순간에 함께 할 결심도 더불어 단단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끝낼 수 있음에도 함께 하고 있다는 건 매 순간 저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지요. 끝을 말하지 못하는 관계는 어딘가 일그러져 있다는 걸 연애할 때는 분명히 알았는데 왜 동업할 때는 잊었던 걸까요. 끝낼 때 끝내더라도 이 순간은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조금 더 오래 같이 일할 수 있겠지요.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