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친구

by 김민지


혼자서 다니는 여행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애초에 들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는 꽤나 얌전했는데 타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 뒤늦게 방황의 시기가 찾아온 듯 보였던 나에게는 홀로 나 자신을 제대로 다시 마주 봐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떠나기 전엔 친구를 사귀고 말고를 떠나 한 곳에서 머물게 될 시간이 매우 한정적이기에 정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Mainz와 같이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도시였던 Mannheime을 둘러보니 오후 네시쯤 되었다. 프랑크프루트로 돌아가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 기차 노선도를 다시 펼쳐보니 기차로 30분 이내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Heidelberg가 눈에 띄었다. 8년 전 이곳 역시 가족들과 함께 여행한 곳이었는데 아직도 뇌리에 선명할 만큼 짧은 시간에도 인상 깊었던 도시였기에 망설임 없이 곧바로 다시 기차에 올랐다. 중소규모의 도시들이라고는 하지만 하루에 세 도시씩이나 당일치기라니 너무 무리인가 싶은 생각은 들었으나 유레일 패스 기한 내에 본전을 뽑아야겠다는 욕심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Frankfurt도, Mainz도 기차역에서 시내 중심까지의 거리가 도보로 멀지 않았으므로 Heidelberg에서도 무작정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오후 다섯 시가 훌쩍 지났는데도 해는 한낮보다도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더위를 좀 식히고자 길을 걷던 중 발견한 대형 슈퍼마켓에 들어가 구경을 하고 있는데 아시아인처럼 생겼으나 나처럼 관광객으로 보이지는 않는, 귀엽게 생긴 조그만 내 또래의 여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잠시 동안만 더위를 식힌 후 슈퍼에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걸었으면 뭐라도 보여야 될 것만 같은데 가면 갈수록 주택들만 도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Frankfurt로 돌아가기까지엔 시간이 남아있긴 했지만 여유롭지는 않았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지나가던 행인에게 길을 물었다.

아뿔싸, 내가 걷는 방향은 시내 중심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던 것이다! 이미 꽤 멀리 걸어 왔기 때문에 발걸음을 급히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멈추어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뒤쪽에서 아까 슈퍼마켓에서 본 여자가 자전거를 끌며 걸어왔다. 이번에도 길을 잘못 가는 실수를 범하기 위해 그녀에게 올드타운으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도 그쪽으로 간다면서 선뜻 같이 가자고 말해주었다. 덧붙여 그녀가 내게 말했다.


"아까 슈퍼에 들어오지 않았어? 사실 아까 너 봤었는데 여기서 또 마주쳐서 놀랐어."

"어? 나도 아까 안에서 너 보고선 아시아인인가 싶어서 괜히 반가웠는데 너는 나처럼 관광객 같지는 않은데."

"나는 아빠가 필리피노고 엄마가 일본인인데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미국 시민권 자고 지금은 여기서 한 학기 물리학 교환학생 4학년으로 있어. "

"아 정말? 너무 어려 보여서 고등학생쯤 될까 싶었는데 벌써 4학년이면 나보다도 나이가 많겠구나. 나는 한국에서 2학년이거든."

"넌 몇 살인데? 난 18살이야."

"뭐라고!? 내가 19인데 넌 벌써 4학년 졸업반이야? 머리가 진짜 영특한가 보다 너, 그것도 그 어려운 물리학을!"

"뭐 딱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근데 이름이 뭐야? 난 앨리슨이야. 너는 그럼 한국인이야?"

"응, 한국에서 유럽에 두 달간 여행하러 왔고 김민지라고 해. 근데 어제부터 막 시작한 거라 아직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게 없어. 이 도시는 아주 예전에 가족들이랑 같이 왔었다가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다시 들렸는데 이따 저녁에 기차로 다시 Frankfurt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려고."

"그럼 돌아갈 때까지는 딱히 계획 있거나 그런 건 아닌 거야? 몇 시까지 가야 돼?"

"응, 나 원래 아무 계획이 없어서. 시간은 기차 끊기기 전에만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나도 오늘 수업도 없고 시간 많은데 그럼 내가 여기 구경시켜줄 테니까 같이 다닐래? 그리고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사는데 꼭 오늘 안 돌아가도 되는 거면 자고 가도 돼!"

"구경시켜준다고?! 나야 진짜 고맙지 그럼. 먼저 그렇게 제안해준 것도 진짜 고맙고 그러고 싶은데 내일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해야 되는데다 짐들이 거기 있어서 오늘 안에는 돌아가 봐야 될 것 같아. 아쉽다."

"그럼 할 수 없지. 그래도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이렇게 알게 돼서 너무 반가워!"


우리는 먼저 그녀의 기숙사에 들리기로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인연 덕분에 Heidelberg의 기숙사를 구경하고 이곳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앨리슨은 먼저 자신의 방과 자신이 취미로 그린 그림들을 나에게 구경시켜준 후 거실에 모여있던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소개시켜 주었다(신기하게도 이 중 한 명이 그 해 9월부터 한 학기 동안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오게 되었는데 정말 그녀와 앨리슨, 그리고 나까지 3명은 2달 후에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한 번도 해볼 경험이 없던 나는 이런 화기애애하고 다 함께 즐거워 보이는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기숙사를 나와 앨리슨은 나를 철학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높은 언덕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선 Heidelberg 시내의 구시가지와 산 중턱에 위치한 고성이 한눈에 보여 전망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기서 오늘 밤을 지새울 수 있다면 달이 어슴푸레 뜬 고요한 새벽녘에 다시 올라와도 좋을 텐데라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 길을 따라 햇살이 가득히 비추는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쭉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불과 두어 시간 전에 처음 본 사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친근하고 익숙한 우리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8년 전에 구시가지에서 우연히 보았던 MINJI라는 이름의 가게가 아직도 있을까 내심 궁금했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 사이 민지가 자라 MINJI에 다시 오게 되다니 인생이 참 재밌지 싶었다.

앨리슨은 내게 '팔라펠'을 먹어본 적이 있는지 물었는데 그것을 먹어보기는커녕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하니 자신을 믿고 먹어보라며 즐겨 간다는 단골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난생 처음 먹는 팔라펠의 신기함보다 서로 매운 향신료를 더 뿌리겠다며 앨리슨과 웃고 떠드는 즐거움이 더욱 컸다.

나 혼자였다면 다른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대강 둘러보고 그냥 돌아갔을 텐데 앨리슨 덕분에 Heidelberg에서의 추억이 8년 전 그때 그 이상으로 오래오래 좋게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참 감사했다. 앨리슨에게도, 앨리슨을 만날 수 있었던 기회도.

친절하게 기차역까지 나를 바래다준 그녀와 작별인사를 할 때의 아쉬움은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렇게 금방 정을 붙이고 떠나면 언제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그랬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의 짧은 첫 만남 이후에도 우리는 한국, 독일 뮌헨, 한국 이렇게 무려 3번이나 다시 만나 함께 지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장소에 구애 없이 기회가 되는대로 다시 재회할 것이다.


문득 앨리슨을 생각하면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고는 하는데, 지금도 그녀는 내 여행 시작과 동시에 만난 소중하고 의미 있는 벗임과 동시에 그 후의 모든 여정에 있어서도 내게 초심자의 운을 가져다 준 인연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믿을 수는 없지만 앨리슨 이외에도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정말 우연으로 만난 인연일까 아니면 어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에 의한 인연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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