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주 변호사 Feb 19. 2023

첫사랑, 그녀(4)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오랫동안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오랫동안 그녀가 남긴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꿈을 꾸면 그녀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꿈속의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섬세하고 친밀했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마주 잡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친밀하지?라고 느낄 때쯤 꿈에서 깨어났다. 늘 비슷한 지점에서의 비참한 말로였다. 꿈이 달콤한 만큼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나를 둘러싼 어둠은 그 농도를 더해갔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짙은 암흑이었다. 


나는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일을 했지만 그녀가 떠난 이후에는 나의 넋도 함께 사라졌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늘 7시가 되면 눈을 떴고, 항상 (어쩌면 의식적으로) 일정한 량의 운동을 했다. 아침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나는 나의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훨씬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직장에 가서는 정말로 열심히 일을 했다. 어떤 경우에도 실수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그녀가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고, 업무 성과도 잘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색을 잃었다. 밤이 찾아오면 나는 하루를 (의도적으로) 열심히 산만큼 반사적으로 견딜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잠들기 전 습관적으로 차가운 유리잔에 위스키를 반 잔 정도 따르고 얼음을 가득 넣어 마셨다. 어떤 때에는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도 했다. 물론 양을 조절하려고 애를 썼지만 적어도 나의 밤에는 적당량의 위스키가 함께여야 했다. 그리고 나는 종종 작업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나의 물건에 남아 있는 어떤 빛은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고, 그 이전의 색채와는 한참 다른 것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정말로 내가 쓸모없어진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빛은 매섭게 바뀌었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습관적으로 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의 눈은 그 이전에 비해 번뜩이는 쪽에 가까웠다. 그 내부는 한 겹의 장막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보이지 않는 막 같은 것이 나의 마음의 한편을 완전히 닫아버렸고, 그 누구도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가 일정 이상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이 귀찮아졌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비치는 나의 모습은 그 이전보다 더 나아졌는지,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호의를 품은 눈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때때로, 나는 나에게 다가온 여자들 중에서 마음이 동하면 가볍게 차를 마시러 가기도 했고,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물론 여자들은 나를 만나면 대부분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대부분 무척 사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적당히 맞춰주면서 그냥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어느 순간, 나는 느꼈다. 나는 분명 그 전의 나와 다르다. 적어도 내 안에 빛나던 무엇인가를 그녀가 떠나며 함께 가져가 버린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다. 


나는 그녀가 오래도록 나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나를 필요로 했을 때, 나는 그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나는 바보스럽게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그녀와 달리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에너지의 파동은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무척 빠르고 어렵고 깊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세심하게 그녀의 상태를 살펴야 했고, 그녀에게 더 깊이 다가갔어야 했다.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아마도 깊은 심해의 바닷속에서 누군가의 구원을 간절하게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고,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늘 그렇듯이, 나는 많은 것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어떤 것들을 절대로 처음으로 되돌리지 못한다. 




그날은 이별 후 가장 많이 술에 취했던 날이었다. 나는 작업실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녘이 다 되어 잠이 깼다. 그 와중에 나는 내가 하루에 반드시 해야만 할 일들과 끝내야 할 일들을 분류하고 있다는 듯이, 그날 아침이 다행히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 오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멍한 상태로 비척거리면서 작업실에서 나왔고 그대로 식탁 위에 잠시(또는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간 밤의 상념은 물론 지나갔지만 마음의 상흔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물론 이제 나아져야 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나아질 수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그 순간 내가 가진 감정은 이런 것이다. 


나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다른 것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만나 나의 잘못을 시인하고, 또 용서를 비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든 간에, 나는 우선 그녀를 무조건 만나러 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 지독한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의 이기심일지도 모르고 또 그 이기심으로 인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더라도, 나는 이제는 더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내가 가지는 이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사랑, 그녀(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