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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Mar 12. 2023

첫사랑, 그녀(5)

오직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


사랑을 알기 전까지의 인생은 편안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사랑을 알게 된 이후에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계속된다. 그것은 그야말로 감정들의 향연이다. 늘 무료한 삶의 한 가닥 가닥을 버티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냈으나 이제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늪에 깊이 빠져버렸다.


나는 늘 우울감이 가득한 세계에서 눈을 떴다. 빛을 잃은 세계는 고통과 맞닿아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은 쓰라렸고 아팠다. 마치 불에 타오르는 듯 열감을 가진 통증이었다. 때때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은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여러 차례 그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 직전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연락을 하는 것은 명백하게 그녀를 방해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의 마음대로 '나와 헤어지는 것을 택하였고, 혼자 있는 것을 원했다.' 무슨 이유에서든 내가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했다. 물론 감정들은 그대로 지나가기도 한다. 그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말이다.


처음 몇 달간 어쩌면 나는 그 감정에 취해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표면적인 관점에서는 크게 변화하는 것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날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내가 '지금 상황에서 나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


"오직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어."


그녀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녀와 나는 당시 한남오거리에 있는 2층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독일에서 생활을 한 외국인이 연 카페였는데, 밤이 되면 도시의 야경이 꽤 아름다워서 근처에 사는 주재원들이 자주 드나들던 고풍스러운 곳이었다. 그녀는 주로 그 카페에서 해바라기씨가 가득 붙어있는 독일빵을 시켜 먹었다. 커피를 좋아했지만 가끔은 루이보스로 우린 밀크티를 곁들였다.


나는 당시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벌써 일 년째 휴학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가끔 만나는 그녀는 학교를 잘나가지 않는 듯했다. 창작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그림도 잘 그려지지 않는 때에는 절대로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공모전과 같이 눈에 보이는 작업을 준비할 때는 항상 생각한 시점에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다른 '어떤 이유로' 학교를 잘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학교에 가지 않게 한 다른 원인이 된 그 이유는 그녀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 늘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말하자면 나의 작업 공간에 다만 몇 퍼센트 정도의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고 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그 드문드문한 연락을 나는 절대 강요해서도, 또 그 기다림을 드러내서도 절대로 안 되었으므로.


그리고 그날 밤, 몹시 지친 얼굴을 한 그녀는 2층 카페에 나타났다. 풍성한 머리는 풀어진 채로 어깨 뒤로 넘겼고, 종종 보았던 하얀색 블라우스와 파란색의 진을 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얼굴이 조금 더 여윈 것 같아 보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뭔가를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해 미안해. 혹시 내 연락을 기다린 것은 아니지? "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잠시 나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생각지 못한 물음에 나는 잠깐 당황했다.


" 음.. 아니야. 지금 공모전 준비 때문에 나도 정신이 없었어. 너는... 잘 지내지? "


" 아... 그렇구나. 공모전. "


그녀는 나의 대답에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 나를 보면서 살짝 웃었다. 그리고 한결 나아진 표정을 잠깐 짓고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보기 시작했다. 마침 붉은 노을이 짙게 드리워진 바깥의 해는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를 둘러싼 그 특별한 공간에 빛이 저물기 시작했다.


" 음, 나는 사실 잘 지내지 못했어. 오랫동안 너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그게 잘되지 않았어. 설명하자면 길지만, "


그리고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의 시간은 오랫동안 내가 기다려왔던 종류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나는 지금까지 와는 다른 공간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과 비교하자면 지금이 분명히 한결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고 나서 그녀는 나에게 사랑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 사람은 사람으로서만 구원받을 수 있지, 그렇지? "


어느새 노을은 저 멀리 사라졌고 해는 완전히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우리는 한참 전에 식어버린 찻잔 앞에 함께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얀 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나는 오랫동안,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렸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말이야. 그런데, 결국 나는 사랑을 택하지 않았어. 오히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해. 하준아. "


그것은 대답을 원하는 말은 아니었다.


" 그래서 나는 내가 몹시 겁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어. 새삼스럽게 말이야. 나는 그토록 사랑을 기다려왔으면서, 막상 사랑이 찾아오자 지구 끝까지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야. 물론 내가 비겁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


그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 하지만 나는 이제 알게 되었어. 단언컨대, 오직 사랑을 하는, 또는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통해 구원을 원해. 삶은 언제나 고통과 가까이 있지. 인생의 대부분은 아무런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특별하지. 만약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야.


하지만 하준아, 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나 봐. 나는 결국 구원받지 못했어. "


그리고 그녀는 울었다.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왜냐면 나는 이미 그녀와 이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눈물로 완연히 번져가는 그녀의 아름다운 왼쪽 뺨, 아름다운 머리카락, 하얀 손가락.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그렇게 하염없이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 괜찮아.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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