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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Apr 09. 2023

첫사랑, 그녀(6)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지난 여행은 너무나 아름다운, 나무랄 데 없는 날들이었다. 날씨조차 우리의 편이었다. 나는 전나무 숲 속을 걸으면서 젖은 이끼 냄새, 통나무 사이사이로 피어오르던 버섯 냄새, 거미줄과 줄 위에 맺혀있던 이슬, 그리고 눈을 가리는 안개의 냄새를 맡았다. 삶은 거대한 파도처럼 다시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결국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껏 혼자인 삶을 살았으나 앞으로는 언제까지나 그녀와 함께일 것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마음의 긴장감이 좋았다. 그 묵직한 감각은 마음을 짓누르는 만큼이나 얼굴을 세차게 두드리는 바람처럼 해방감을 같이 안겨주었다. 그 모순된 감정들은 종종 나를 숨 쉴 수 없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그 공간, 그 시간 속에서만 머무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그녀에 대한 사랑이 나를 강하게 억눌렀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겠다.


벌써 자정이다. 나는 이 시각이 되면 늘 나른한 피곤을 느끼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을 느낀다. 불을 끄고 잠을 청하면서 눈을 감고 있지만 나의 뇌는 지난 여행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늘 나보다 반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그리고 걸을 때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다. 그녀는 늘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 때때로 자기 자신은 마치 이 공간에 없는 듯 행동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부끄러움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으나 한참 뒤에서야 그것이 그녀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그녀의 마음의 벽을 잘 보이지 않는 옅은 느낌으로 가장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무척 활달하고 잘 웃었으며 많은 것을 수용하는 사람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대부분의 수줍은 사람들이 호의를 품을 수밖에 없는 친밀감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이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고 다소 의지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녀 자신에게는 가장(假裝)적인 일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속이는 느낌으로 사람을 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이끌려온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다. 그녀는 오히려 상당히 솔직한 편에 가까웠으며 마음을 꾸미는 일에는 재능이 없었다. 쾌활함과 자유로움은 그녀가 가진 본성 중 하나였다.


지금에 와서도 나는 실제의 그녀의 모습을 잘 알지는 못한다. 딱 한 번 그녀가 견고하게 쌓아둔 그 방어벽 너머의 실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몹시 지친 얼굴을 하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시기의 그녀는 진흙탕 속에 아무렇게나 굴려진 사나운 이리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앞만 쳐다보던 그녀는 재빠르게 나에게 눈길을 던졌다. 아주 잠시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눈에서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내 몸을 감싸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더니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그녀를 알고 지냈던 수 년동안(그 시간 속에는 많은 역경의 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너무나도 놀라 잠깐 경직되었지만 - 이윽고 이 상황에서 당연히 해야 할 행동 -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행동을 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오래도록 울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우는 이유가 어떤 슬픔 때문이 아니라 오랜 피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여러 가지 일들에게서 짓눌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오로지 혼자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 그 울음은 잦아들었고,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그녀의 눈 속에서 옅은 장막이 걷히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녀는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고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실제의 그녀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우물 뒤에 앉아 있던 그녀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지만 실제의 그녀는 방금 세상에 나온 것처럼 무척 연약하고 따뜻하며 온기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무척 수용적이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나를 완전히 의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당연한 듯이 안아주었고 그녀의 등과 어깨를 조용히 어루만졌다. 그녀는 내가 하는 대로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제발 무슨 말이든 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 시간은 완전히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 미안해. 갑자기 울어서. "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 작았다.


아니야. 괜찮아. 나는... 오히려 고마워.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내 말이 그녀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다. 점차 내가 안고 있는 그녀의 형상이 잠시간 실제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내 품에서 몸을 빼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채 무언가 생각에 잠시 잠겨있는 듯 보이더니 이윽고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방안은 어두웠으나 창문 밖으로 불빛이 들어왔다. 그것은 그녀의 상을 추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녀는 두 손을 의자 등받이에 올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 네가 있어서 나에겐 정말 다행이었어. "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다시 그녀의 자리로 돌아가버렸음을 알았다. 방금 알을 깨고 잠시 세상에 나왔던 그녀가 다시금 단단하고 무거운 껍질 뒤의 공간으로 슬며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아득한 수평선을 떠올리게 했다. 그곳은 무척 조용하며 어떤 바람도 불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처럼. 하지만 방금 전까지는 분명 그녀는 그곳에서 나오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분명 이 생각을 말로 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쩌면 그녀를 실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분명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삶에의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나는 간절히 원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기에는 결정적인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완전히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말았다. 나는  왜 그 문이 닫혀버린 것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역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 문이 다시 한번 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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