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 : 서로의 '이웃'일 뿐 친구는 아니었던 우리

모든 이름은 가명이며, 사생활 보호를 위한 각색이 일부 들어가 있습니다.

by 윤해원

수빈은 신입생 대표였다. 그 말은 즉, 우리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아이였다는 뜻이다. 고등학교에서의 첫날이었으니 모두가 줄이지 않은 교복 차림이었지만, 수빈의 치마는 무릎 아래까지 유독 길게 내려와 있었다. 긴 머리칼은 약간 낮게 묶어 깡총하니 아래로 처져 있고, 오른손바닥을 펼쳐든 채 왼손에 쥔 선서문을 또박또박 낭독하는 뒷모습. 그게 내가 기억하는 수빈의 첫 모습이자 오랫동안 가져가게 될 첫인상이었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특성화고였기에 아이들 대부분이 취업을 목표로 했다.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만 따로 모아서 작은 규모의 입시반이 꾸려졌는데, 수빈과는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신입생 대표였던 수빈을 그곳의 모두가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나 또한 수빈을 의식했다. 수빈이 특별히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애를 재수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열일곱 살이란 그런 나이였다.


하지만 수빈의 웃는 얼굴을 본 순간, 난 그 애를 약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수빈은 웃을 때 전혀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얼굴의 모든 근육을 사용해서 아주 환하게 웃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방어벽 없이. 전교 1등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새침데기 이미지가 그 애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피부는 희었고, 키는 작은 편이었으며, 안경은 쓰지 않았다. 얼굴 생김새 또한 날카로운 느낌 없이 둥글둥글한 인상이어서 거북함이 없었다.


입학 성적으로 잠시 화제가 되었던 걸 제외하면 수빈은 그리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조용히 지냈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잘 어울렸다. 나도 수빈과 가끔 대화하며 지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수빈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보다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당시에 난 열성적인 네이버 블로그 이용자였는데, 무슨 용기였는지 모든 글을 전체공개로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 검색으로 내 블로그에 들어오는 걸 오히려 반기던 시기였다. 블로그란 대개 취향과 정서가 강하게 드러나는 공간이고, 검색어 또한 개인의 취향과 정서를 반영하기 마련인데, 그런 방식으로 낯선 타인과 연결되는 걸 그때는 상당히 즐겼다. 근데 설마 학교 친구와 연결될 줄은 몰랐다. 그게 수빈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고.


내가 아주 오랫동안 좋아한 작가가 있었다. 블로그에 그 작가의 그림을 잔뜩 퍼와서 올려두고, 해당 작가의 감성을 흉내낸 글들을 열심히 써서 올렸다. 입시반 친구였던 A와 블로그 서로이웃을 맺고 있었고, 학교 친구 중에서는 A가 유일한 이웃이었는데, 설마 블로그를 하는 애가 우리 학교에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나랑은 이웃이 아니었지만 A와는 이웃이었던 수빈은 아마 A의 블로그에 내가 남긴 댓글을 보고 내 블로그를 찾아왔던 것 같다.


교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수빈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여행자'가 너야? 나는 깜짝 놀랐지만 굳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그에 있는 그림들 다 니가 그린 거야?"


아니라고 하니 수빈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 순간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수빈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어떤 영역에서든 자신만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사람들을 매우 좋아했다. 내가 블로그에 올려둔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들에서 수빈은 그런 천재성을 느꼈던 것이다. 작가 이름을 알려주자 수빈은 그걸 메모했고,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서로이웃 신청 해도 돼?"


"응. 근데 다 전체공개라 이웃 해도 따로 볼 건 없어."


"그래도 좋아."


수빈과 나는 그렇게 이웃이 되었다. 그 후로도 우린 쭉, 친구는 아니었으나 서로의 이웃이었다. 내가 수빈과 친구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난 수빈에 관한 많은 것들을 몰랐고, 수빈 또한 나에 관한 많은 것들을 몰랐다. 그런데 블로그 이웃이란 참 기묘한 관계다. 그 사람과 친구로 지내면 알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의 친구들은 모르는 깊은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관계. 수빈과 나는 그런 사이였다.


한편 수빈은 블로그에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써놓는 편은 아니었다. 글들은 보통 암시적이거나 은유적이어서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수빈만이 읽을 수 있는 암호로 적힌 비밀 일기장 같았다. 그런데 그 암호를 해독하는 사람이 있었다. 수빈의 블로그 이웃인 파도였다. 수빈이 올린 알쏭달쏭한 일기에는 늘 파도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비밀 댓글 기능이 있는데도 둘은 항상 공개 댓글로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봐 달라는 듯이. 혹은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게 참 쿨해 보였다. 사소한 수다라도 모조리 비밀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게 청소년의 특징인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앞에서 대화하다니…….


파도와 수빈이 정확히 무슨 관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이었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아무튼 그 둘은 무척 친해 보였고, 나누는 대화는 수준이 높아 보였다. 나도 그런 친구를 갖고 싶었다. 둘 사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예민하고 섬세해 보이는 파도와도, 그리고 수빈과도 친구가 되고 싶었다.


수빈은 종종 책이나 영화 리뷰를 간단히 블로그에 올리곤 했다. 나는 수빈이 언급한 책과 영화를 전부 찾아보았다. 그 무렵의 우정은 거의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줄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누어 끼며.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몰래 곁눈질하며.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본 뒤 토렌트로 아주 느리게 다운로드받은 저화질 영화를 집에서 혼자 보면서, 침침한 모니터 불빛 속 그 사람의 세계를 조심스레 더듬어보는 게 그 시절 사랑과 우정이 시작되는 방식이었다.


수빈이 좋다고 말한 책들은 전부 나에게도 좋았다. 취향이 비슷할수록 좋은 거라고 단순하게 믿던 시절이었기에, 정말로 수빈과 가깝고도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점점 기대하게 되었다. 다만 영화 취향은 별로 비슷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애써 그 사실을 무시했다. 하품을 쩍쩍 하고 반쯤 졸면서 본 영화들도 재미있었다고 굳게 믿었다. 그때는 그럴 수 있었다. 단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도 그걸 쉽게 좋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빈과 나는 언제까지고 이웃이었을 뿐, 결코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친구란 함께하는 사이다. 그 사람의 곁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다. 이웃은 서로를 읽는 사이다. 서로의 일기를 읽되, 그 일기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함께하지는 않는 사이다. 언제나 이 정의가 성립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수빈과 나는 줄곧 이웃이었다.


수능 날이 되었다. 그건 청소년기와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성인식이었으며, 수빈과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에 나는 누군가와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수빈의 뒷모습을 보았다. 수빈은 서 있었고 이름 모를 누군가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약간 수줍음을 타고 주위를 경계하는 듯한, 예민하고 섬세해 보이는 그 이목구비를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애가 바로 파도라는 걸.


수빈은 파도를 향해 가희야, 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단 한 번 들었을 뿐인 그 이름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뜻밖의 장소에서 파도를 대면한 놀라움으로 내 눈은 커졌다. 난 그게 무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파도를 빤히 쳐다보았을 것이다. 파도도 내 쪽을 바라보았는데, 나의 시선을 거북해하는 것 같았다. 수빈도 곧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했지만 난처해 보이는 미소만 지을 뿐 인사를 해오지는 않았다. 그때 확실하게 느꼈다. 수빈과 가희 사이에 내가 끼어들어갈 자리는 없다는 걸. 나는 수빈을 못 본 체하고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언젠가 수빈이 나를 뒤따라온 적이 있다. 그 시절의 난 학교 선생들에게 괜히 반항하는 일이 잦았다. 평소처럼 별것도 아닌 일로 선생에게 대들고는 교실을 뛰쳐나와 화장실로 향했던 어느 날이었다.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고 눈물을 흘리고 있자니 복도 끝에서부터 황급히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 도착한 사람은 수빈이었다.


"해원아, 안에 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수빈이, 왜 하필 수빈이 나를 쫓아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리고 수빈에게 우는 것을 들키고 싶지도 않아서 조용히 호흡을 삼켰다.


수빈은 문을 쾅쾅쾅 두들기며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그건 가볍게 똑똑 두드리는 노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쾅쾅쾅 두들겼고, 목소리는 왠지 들떠 있었다. 표정을 확인할 수 없는 문 너머 수빈의 음성으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고양감 때문에 나는 점점 더 당혹스러워졌다.


"응, 나 여기 있어."


대답을 안 하면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을 것만 같아서 얼른 대답했다. 수빈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해원아, 너 울어?"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알아서 들어갈게, 일단 혼자 있게 해줘.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확실한 기억은 아니다. 수빈은 교실로 돌아갔고, 나는 갑작스러운 수빈의 들이닥침 때문에 눈물이 뚝 멎었지만 얼마간 더 그곳에 있다가 교실로 돌아갔다.


성인이 된 후 수빈과 만나 식사를 하고 노래방에 갔던 기억도 있다. 그날따라 자꾸 음이탈을 냈다. 원래 잘만 부르던 노래들이었는데. 돌이켜보면 나는 늘 수빈 앞에서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던 것 같다. 멋져 보이고 싶다면 몸에 힘을 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건 수빈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열여덟 살의 수빈은 화장실까지 쫓아와서는 힘이 한껏 들어간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들겨댔고, 스물두 살의 나는 기교를 부리려고 목에 힘을 줬다가 평소라면 절대 안 틀릴 부분에서 실수를 했다.


그날 수빈이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면, 혹은 내가 노래방에서 수빈이 감탄할 만큼 편안하게 노래를 잘 해냈다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