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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Sep 18. 2024

"길고도 긴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가요."

김현식의 '가리워진 길'을 듣는 밤


소냐 /

바냐 아저씨,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테죠. ,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아저씨,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우린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그의  손에 얹고는 지친 목소리로) 그곳에서 우린   있어요.


-  텔레긴이 나직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소냐 /

평화롭게   있을 거예요. 천사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면서요. 모든 악과 고통은  세상을 감싸는 위대한 자비의  속으로 가라앉게  거예요. 그날은 평화롭고 순수하고 따스할 거예요.  믿어요. 굳게 믿어요. (눈물을 닦는다) 불쌍한 바냐 아저씨, 울고 계시군요. (흐느낀다) 아저씨는 평생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아오셨죠.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아저씨,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있을 거예요. (그를 껴안는다)   있어요.


/ 안톤 체홉, <바냐 아저씨> 중에서




아마 2022년 봄 즈음이었을 것이다.

대학 때 친했던 후배 H에게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졸업 후 긴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과 교류도 없었고 소식이 없었던 후배는 미국에서 결혼과 이혼을 겪고 한국에 돌아온 후였다. 내가 너무 보고 싶었다며 연락을 해왔던 H와 오랫동안 영상 통화를 했다.

H는 한국에 돌아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지내며 글을 쓰고 있었다.


그날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H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너무나 좋았다고,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저 소냐의 대사가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열심히 이 생을 살아내고 나면 하나님 곁으로 가서 쉴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H를 위로했던 것 같다. 그간에 그녀가 겪었을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대학 시절에도 H는 부모의 짐을 나눠지고 어린 동생을 엄마처럼 키우며 고단하게 지냈었다. 긴 대화 끝에 그래도 안심이 됐다. 그녀가 이제 가족들에게서 조금은 벗어나 독립된 공간을 갖고 자기만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불안해 보였지만, 그래도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H의 말에 끌려 나도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았다.

남자 주인공이 연극 연출가기 때문에 영화에는 연극 연습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연극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영화를 보는데 뭔가 굉장히 그리웠다. 같은 목표를 갖고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테이블에 앉아 리딩을 시작하는 모습부터 같은 장면을 다르게 연습하고 '뭔가가 일어났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뭔가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 같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상처받고 망가진 채 다시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체홉의 인물들, '바냐 아저씨'와 '소냐'가 그렇듯 묵묵히 살아가야만 한다. 체홉의 작품을 다 읽거나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어느 순간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이 진심으로 와닿기 시작했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어쩔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며 내 삶의 운전대마저 내가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무언가 잘못돼 간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길 위를 걸어야 하고 때론 달려야 한다. 체홉의 작품을 읽다 보면 결국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는 것이 인생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해법을 고민하는 문제 그 자체. 해소는 없이 문제와 해결 과정만이 가득한.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며 살아간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 모든 어려움이 행복을 위한 전주곡으로 바뀌는 꿈같은 결말은 없다. 그저, 사정없이 계속 길 위에서 헤맨다. 걷는다. 달린다. 그러다 묻는다. 멈춘다. 또 달린다.


길 위에서 위안이 되는 존재를 만나면 함께 걷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그런 삶에 유일한 희망이란 어쩌면 언젠가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뿐일 것이다. 내 삶이,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 김현식, 가리워진 길




어제와 오늘 계속해서 김현식의 '가리워진 길'을 들었다. 유재하와는 또 다른 매력. 탁하고 거칠어 좋아하지 않았던 김현식의 목소리가 언젠가부터 좋게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곡에서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아름답고 매끈하고 잘 매만져진 것들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투박하고 거칠어 더 내 삶과 닮아있는 것 같은 그의 음성이 요즘 자꾸 마음에 와닿는다.


언제나 길을 벗어나 집에 도착하길 바랐다. 길은 어두워도 마침내 도착한 곳은 빛나길 바라며. 하지만 체홉의 작품 속 인물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 속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그저 걸어가는 것 자체가, 거칠어지는 마음으로 묻고 또 물으며 답을 구하며 헤매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아닐까. 그렇게 포기 않고 울고 웃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있겠지. 체홉의 인물들에게 보이는 애처롭고 안쓰러운 사랑스러움이 내 삶에, 내가 보는 삶들에도 스며들겠지. 그러다 보면 어느덧 그 모든 길을 걷고 걸어 나는 좀 더 웃음이 많고 다정한 사람이 돼 있을 것이다.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짐을 지고 받아들이다가도 거칠게 묻고 화내고 울고 다시 웃으면서 살아가다 보면.


지금 내 앞에 가리워진 길도 어쩌면

저마다의 꽃길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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