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형 꿈에서 동사형 꿈으로 변화하기까지.
여러분은 동사형 꿈과 명사형 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과거 학창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대부분 명사형으로 이를 대답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나 또한, 학창시절 생활기록부에 꿈을 적을 때마다, 진로 진학과 관련된 상담을 할 때마다 '선생님' '사회복지정책 전문가' 등 어떠한 특정 직업에 대해 명사형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아마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 생활기록부에 적혔던, 일상적으로 이야기하곤 했던 꿈과 목표들도 모두 교사, 간호사, 의사 등 하나의 명사로 적힌 직업이었을 게 분명하다.
여기서 ‘동사형 꿈’이라는 표현을 명사형 꿈인 <직업>과 대치되는 단어로 활용할 수 있는데(물론 이 표현이 생소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다) <동사형 꿈>이란, 꿈을 특정 직업 등 명사형으로 표기하는 게 아닌 "~하는 사람이 되겠다", "~하기 위해 ~한 꿈을 꾸겠다" 등의 구체적인 ‘동사’로 목적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릴 때 단순히 의사가 되겠다, 교사가 되겠다,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표현했던 꿈 방식은 그저 명사형이었을 뿐, 이제는 꿈을 “의사가 되어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 생명을 주는 삶을 살 것이다.” 혹은 “나는 축구선수가 되어 어린 유망주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이콘이 될 것이다.” 등의 ‘동사’가 담긴 의미로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연세대 청소년학과 이광호 교수는 본인의 저서인 [아이들에게 동사형 꿈을 꾸게 하라]에서 ‘동사형 꿈’이 어른들이나 외부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실현해가는 포부이자 가치 실현의 단계라고 표현했다. 동사형 꿈은 빛을 투과하는 프리즘과 같아 젊은 세대들이 저마다의 포부와 가치를 프리즘처럼 비춰 스스로 형형색색 꿈의 스펙트럼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다들 믿지는 않지만 나는 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사범대 치고 너무나 왕성한 외부활동과 전공 기피한 과목 선택으로 경영학과 학생 아니냐, 선생 재목은 아닌 도라이가 입학했다는 반응도 참 많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교사 딸내미인데 보고 배운 짬은 있어 나름대로 아이들을 위한 활동에도 많이 참여했다.
그중 본인이 중학생 때부터 시작해 대학생까지 꾸준히 실천한 교육봉사와, 학과 졸업 전 필수인 교생 실습 등에서 가장 많은 아이들과 대면하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 참 많았더랬다. 하지만 그 때에도 여전히 나는 아이들의 진로진학을 도우며 그저 좋은 대학교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대학교를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직업>을 설정해야 할 지 등의 고민만 같이 나눴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모든 것을 바꿔줄 사건이 발생했다. 보통 사범대에 입학하면 전공 과목 이외에도 임용고시을 보기 위한 교직 과목을 필수로 수강하는데, 그때 만난 한 교수님 덕분에 교직 강의 중 처음으로 동사형 꿈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설명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꿈이 고정된 형태의 명사가 아닌 동사형으로 표현될 수 있다니.
지금까지의 난 뭘 한 거지?
다양한 꿈이 자유롭게 변형되고, 다변하면서도 역동적인 힘을 내뿜을 수 있다니 매우 신선하고도 새로운 개념이 아닌가? 왜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는 이러한 개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하나의 늦은 깨달음에 스스로 아쉬움도 들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그래서 더욱 가치 있는 동사형 꿈이야말로 아이들의 미래와 꿈, 진로 계획에 진심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안 까닭이다. 과거의 우리는 이러한 동사형 꿈을 품지 못하고 살았던 사실이 더욱 안타까우면서도, 이제부터라도 동사형 꿈을 꾸며 살고 싶다고 느꼈던 지점이 바로 그 날이었다.
그런데 왜 기존의 학습자들은 꿈을 국한된 명사형 안에서 결정하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은 이 모든 게 <고정관념> 때문이다.
과거부터 고정된 성 역할과 직업군, 사회상 등에서 이런 고정관념 때문에 직업으로 미래를 국한시킨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러나 21세기 이후 시대가 급격히 변화하며 수많은 직업군이 사라졌고, 또 몇 배로 또 새로운 꿈과 직업이 생겨나며 다양한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며 untact 시장의 확장과 뉴노멀 시대를 이끌어 사회상, 생활상을 모두 뒤집어놓았음은 물론이고.
이제 크리에이터라는 이름으로 본인 스스로 본인만의 꿈을 결정지어 나의 일을 표현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디지털 노마드처럼 장소나 시간, 업무에 국한되지 않은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직업의 목적이 뚜렷한 사람들보다는 그저 자기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부각되고 있는 덕이다.
이제 단순히 "~~ 가 될 것"이라기보다 "~~ 가 되어 무언가를 할 것이다." 등의 하고 싶은 것들이 명확한 동사형 꿈 표현이 대세가 된 지금, 과연 나는 나의 꿈을 동사형으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자면, 단순히 돈을 더 벌고 싶어서, 혹은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뛰어들겠다는 말은 완벽한 동사형 꿈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더 구체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동사형 꿈은 본인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포부, 그리고 구체성을 담아 표현하는 자신만의 길인 것 같다. 그저 바로 내 옆,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만의 동사형 꿈을 가진 친구들이 참 많다. 꿈을 키워나가는 친구들의 눈빛은 참으로 반짝거린다. 자기 자신만의 포부와 가치를 동사형 꿈에 가득 담아 순간순간 영롱하고 아름다운 빛을 마음껏 뿜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별처럼 반짝거리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그들의 동사형 꿈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은 그 꿈을 품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을 거쳤고, 고난과 시련을 극복했을지 가만히 떠올려보면 그들의 눈빛 속에서 또 하나의 빛줄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빛줄기 속에서 나는 가만히 내 꿈이 과연 동사형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 떠올려본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내 눈빛은 과연 다른 사람이 볼 때 반짝이고 있는지를 말이다.
사실 거제에 내려온 첫날, 그리고 꿈 발표를 했던 그 날, 이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의 눈빛은 동사형 꿈을 담아 명확히 빛나고 있었기에 내가 더욱 초라해 보였다. 애써 나와 나의 포부를 여러 수식어로 포장하고 감싸 보았지만 각자의 행복한 삶에 집중하는 그들과 비교하면 목적성이 없이 그저 목표만을 위한 꿈이었기에 더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거제에서의 한 달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커진 순간 나도 나만의 동사형 꿈을 명확히 설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구체화할 계획을 세우는 건 결국 ‘명사형 꿈’을 이루기 위한 방식밖에 되지 않았기에, 나는 무엇을 하고자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찰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꿈 발표 이후 시시때때로, 다 같이 혹은 홀로 자신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주변인에게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기도 하며 그제야 스스로를 인정하고, 포용하고, 받아들이고, 포기했다. 비로소 동사형 꿈을 조금씩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던 순간이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 과연 ‘동사형 꿈’이 존재하는지. 내 목표는 매번 많은 수정 과정을 거치고 시도 때도 없이 변화구를 던지며 뒤흔들리고 있으니.
딱 1년 전의 나는 항상 이렇게 얘기했다. 꿈은 꿈일 뿐, 사람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며. 꿈은 이뤄지지 않을 허상일 뿐이지만 목표는 이뤄질 수 있는 현실이라며. 그러나 거제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3달의 기간이 흐른 지금, 나에게는 꿈을 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꿈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떠한 조그맣고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아직 나는 여전히 현실을 아등바등 살려고 스스로와 타협하며 ‘명사형 꿈’만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 이제 ‘동사형 꿈’의 가치를 알고 이를 품고 살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스스로는 이미 바뀌고 있음을.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변화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을 안다.
그래서 모두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우리 모두 ‘동사형 꿈’을 꾸는 사람들이 되자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그리고 ‘동사형 꿈'을 함께 꾸고 나누며 천천히 한 발자국씩 같이 나아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