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수능모드로 너무 각 잡고 레벨테스트를 본 탓에 무료 ESL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위대한 한국식 암기교육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시험 보기 전에 가볍게 인사 나누던 옆자리의 아가씨와 앞자리의 아저씨는 인사 외에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영어를 못하는 듯했다.
무료과정을 놓친 건 아쉽지만 어차피 배울 거 돈 내고 배우면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컬리지의 ESL 수업을 등록했다.
한 반에는 1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다.
첫 시간에는 둥글게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했는데, 같은 국적이 하나도 없이 떠듬떠듬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이 마치 전현무가 진행하던 JTBC 예능인 '비정상회담'을 촬영하고 있는 듯해서 자꾸 웃음이 났다.
유일하게 같은 국적인 내 또래의 여자분이 있었는데, 레벨테스트를 할 때 사무실로 불려 갔다가 나오면서 봤던 바로 그분이었다.
그분 역시 레벨테스트를 너무 잘 봐서 무료과정에선 쫓겨나고 이 수업을 등록했다는 웃픈 얘기를 듣고 동병상련을 느끼며 금세 친해졌다.
교재는 한국 어학원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구성의 책이었다.
한 주제에 대한 본문을 읽고 연관 단어들에 대한 뜻과 활용을 익히고 나면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문답을 통해 점검하고 최종적으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
재밌었던 점은 동양계 학생들이 강력한 단어실력을 갖고 있는데도 말이 없는 반면, 남미나 유럽계 학생들은 잘 몰라도 일단 얘기하고 본다는 거였다.
10명 중 4명인 한국, 중국, 일본 학생들은 교재에 있는 웬만한 단어는 이미 알고 있었고 어떤 단어는 꽤 전문적인 단어라 비전공자들은 잘 쓰지도 않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알고 있어서 선생님이 놀랄 정도였다.
터키, 독일, 덴마크,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학생들은 단어의 어근이나 어미를 보고 그 뜻을 유추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모국어와 비슷한 단어들이 많았기 때문에 뜻을 정확히 모르더라도 그저 생각나는 대로 일단 얘기해 보는 모습이 왠지 더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것 같아 부럽기도 했다.
나도 하루빨리 수업에 적응하고 영어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아님 말고'의 그 뻔뻔함과 용기를 배우고 싶었다.
지역소식을 찾아보다가 매주 금요일에 교회에서 열리는 무료 ESL수업을 발견했다.
집에서 차로 25분 정도 거리였지만 다녀오는 길에 코스트코나 아시안마트에 들를 수 있는 동선이었고, 무엇보다 무료라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참여희망 이메일을 보내자 바로 답변이 왔다.
시작한 지 2주밖에 안되었으니 언제든지 와도 되며 부담 없이 참여하라는 교회 특유의 오픈마인드가 느껴지는 이메일이었다.
교회의 수업은 주로 60대 정도의 교인들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졌는데, 무료라 그런지 참석자도 많고 매주 꾸준히 나오는 사람보다는 어쩌다 한 번씩 와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수업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가벼운 대화를 익히거나 어떤 주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말하는 법을 연습했고, 쉬는 시간엔 맛있는 다과나 커피, 티들도 제공되었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수업 중간에 15분 정도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종교적으로 다가오기보단 그저 좋은 말씀 듣는 정도라 큰 부담은 없었다.
이렇게 월, 수, 금, 주 3일 하루에 2시간 정도는 꼭 영어만 써야 하는 시간이 생겼다.
하루종일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 비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수업이 아니면 마트에서 장 볼 때 외에는 영어를 쓸 일이 없는 게 미국생활의 현실이라 강제로라도 영어를 써야 할 일을 만들어야만 했다.
아직은 수줍고 자신감이 없어서 발표도 부족하고 아쉬움이 많지만 그래도 뭔가를 배우며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친구도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