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미국에 온 뒤 남편은 병적이라고 할 정도로 집에 가만히 있질 못했다.
십여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처음으로 맞이한 안식년(?)이 너무나 낯설고 갑자기 늘어난 여가시간에 가만히 있는 게 몹시 불안한 눈치였다.
그래서 학교 수업이 없는 날에도 추가로 들을 수 있는 수업들을 찾아 듣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늦깎이 복학생의 감성을 만끽하거나 Research Triangle에서 열리는 세미나에도 기웃대며 바쁘게 보내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부지런히 집 주변을 탐험하며 돌아다니는 남편 덕분에 24시간 내내 둘이 꼭 붙어 있어야만 했던 상황이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남편은 매일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어디에 무슨 슈퍼마켓이 생겼고, 미용실이 어디에 있으며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놀이터가 새로 지어지고 있다는 등의 새로운 소식들을 알려주었고 덩달아 나까지 이곳에 적응하는 게 빨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듀크대학 채플에서 매주 일요일 저녁에 공연이 열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하면 누구나 참석이 가능하고 심지어 무료라니 놀거리나 즐길거리에 목말라 있던 우리에게 딱 맞는 이벤트였다.
한국에서조차 연주공연은 몇 번밖에 가본 적이 없기에 아이들의 반응이 걱정되었지만, 적어도 조용히 앉아는 있어 줄 거라는 믿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듀크대로 향했다.
듀크대는 UNC만큼이나 우리 집과 가까웠다.
주말이라 학생들이 많진 않았지만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넓은 캠퍼스는 UNC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UNC가 좀 더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느낌이라면 듀크대는 좀 더 시크하고 멋스러운 느낌이랄까?
나중에 아이들 중 누구라도 이곳으로 돌아와 UNC나 듀크대에서 공부를 하면 어떨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과 함께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며 채플로 향했다.
꽤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이번주 공연은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였는데 이 멋진 공간에서 웅장하게 울리는 오르간 소리에 푹 빠져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새 채플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고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조금은 낯설고 어려운 곡들이었지만 높은 천장까지 울리는 오르간 소리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오롯이 연주를 즐길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아이가 옆에서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몇 곡 남았어요?", "언제 끝나요?"라고 물어보는 통에 중간중간 맥이 끊겨버렸다.
그래도 아이들에겐 지루하기만 했을 텐데 순서지에 나온 곡들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인내심을 더하며 조용히 있어주는 게 고마웠다.
한 시간 남짓한 공연에 열 곡 정도가 연주되는 동안 웅장하고도 섬세한 파이프오르간 소리만이 채플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무리 둘러봐도 연주자가 보이지 않자,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연주를 하고 있는 거냐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오르간 연주자가 나와 인사를 할 때가 돼서야 채플 뒤편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 옆의 작은 문을 발견했고 우리가 들어온 문 바로 위에 연주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뒤편을 향해 돌아서서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제야 겨우 다 끝났다고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길어지는 박수소리에 혹시라도 앙코르 공연이 있진 않을까 조마조마해졌다.
다행히(?) 공연은 그대로 끝이 났고, 채플 밖으로 나오니 이미 어둑해진 캠퍼스 건물마다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엄마, 여기 꼭 해리포터에 나오는 것 같이 생겼어요."
한창 해리포터 정주행에 빠져있던 아이들은 이렇게 생긴 건물들을 영화에서 봤다며 신기해했다.
"여기 멋지지? 나중에 여기서 공부하면 진짜 멋지겠지?"
"별로요."
채플 게시판에는 다음 주 공연이 현악 3중주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요일 저녁의 문화행사로 매주마다 오고 싶지만, 이번엔 멋 모르고 따라와 준 아이들이 과연 앞으로도 순순히 따라와 줄지는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