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쇼핑몰마다 주황색 글씨나 호박장식들이 늘어가고 마트엔 입구부터 핼러윈 준비용품들이 주력 상품으로 진열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핼러윈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핼러윈의 백미는 'trick or treat'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 달여 동안 핼러윈 장식들로 집안팎을 꾸미는 것 이야말로 진정한 핼러윈 즐기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네마다 핼러윈 장식에 진심인 집들이 많아서 지나다니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국에 있었으면 우리도 아이들 핼러윈파티를 준비하고 있겠지...'
마트마다 핼러윈을 위한 상품들이 가득했다.
식료품 코너에는 평소엔 보지 못했던 호박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처음엔 오렌지에 그림을 그려놓은 줄 알았던 것들도 자세히 보니 자그마한 호박들이었다.
이런 장식들을 좋아하는 나는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나중에 이고 지고 한국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 허벅지를 찔러가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구매욕구를 참았다.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핼러윈은 재밌는 옷 입고 유치원에 가서 사탕이나 초콜릿을 많이 받아오거나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노는 날이었다.
이렇게 사방이 핼러윈에 진심인 문화를 처음 접하는 아이들로서는 이 모든 게 신기하고 트릭오어트릿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높아졌다.
"엄마, 우리 핼러윈 때 트릭오어트릿 할 수 있는 거죠?"
"글쎄? 그날 분위기를 좀 보자. 아마 할 수 있을 거야."
집 근처 농장에선 핼러윈을 맞이하여 다양한 호박을 팔고 있었다.
호박 종류가 이렇게 많다니, 우리가 알고 있던 커다랗고 넓적한 주황색 호박 외에도 크기도 모양도 너무나 제각각인 호박들은 한데 쌓여있는 것만으로도 근사한 오브제가 되었다.
이런 진귀한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잠시 차에서 내려 구경을 하는데 농장주인이 나와 매의 눈으로 우릴 지켜보고 서 있었다.
굳은 얼굴에 괜히 기분 나쁘고 위축돼서 그냥 차를 돌려 나오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찍은 풍경사진을 나중에 보다 '사지 않으면 사진촬영 금지!'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그제야 발견했다.
사람들이 사지는 않고 한참 구경하다 사진촬영만 하고 가서 주인이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딱 봐도 안 살 것 같았나 보군.'
맛있는 과일도 사고 시장 구경도 할 겸 이른 주말 아침에 파머스마켓에 갔다.
박스째 구입하거나 대용량으로 사지 않으면 마트와 비교해서 가격에 그다지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쌓아두고 먹는 과일 외에는 좀처럼 살 게 없었지만 북적북적한 시장을 구경하는 건 재미있었다.
가락시장과 느낌이나 구조가 흡사한 파머스마켓은 한 평이 아쉬워 다닥다닥 붙어있는 우리나라의 가게들과 달리 띄엄띄엄 널찍널찍하게 자리들을 잡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MS언니에게 'Honey Crisp'이라는 품종이 맛있다는 추천을 받아 사과 한 바구니만 사려고 했는데, 계산하는 동안 시식해 본 건조 사과칩에 홀랑 넘어간 아이들 때문에 사과말랭이까지 한 봉지 사게 됐다.
봉지에 가득 담긴 사과 열개가 $8이었는데, 겨우 과자봉지만 한 말린 사과칩 한통을 $8이나 주고 사다니.
계산하고 돌아서며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이들은 시장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사이에 사과칩 한통을 뚝딱 비웠다.
핼러윈 시즌이라 그런지 시장에도 호박이 잔뜩 쌓여 있었다.
농장에서와는 달리 사진을 찍어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크기도 모양도 다른 호박들이 농장보다 종류가 훨씬 많아 보였다.
알록달록 다양한 색상의 호박들은 쌓아만 둬도 너무 예뻤다.
처음 보는 신기한 품종들이 많았는데, 단순히 장식용인지 아니면 요리에도 사용해서 먹어도 되는 품종들인지 궁금했다.
이렇게 호박이 많은데 그냥 가기 아쉬워서 쪼그만 호박을 하나 골랐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기회에 커다란 잭 오 랜턴을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너무 큰 건 카빙은커녕 나중에 처리하기도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아이들이 스스로 자르고 속을 파낼 수 있을만한 귀여운 크기의 호박들 중 가장 예쁜 모양을 골랐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레드망고가 한 박스에 $8이었다.
한국에서는 냉동망고만으로도 행복해하던 아이들이 미국에 와서 좋은 점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망고였다.
마트에서 사는 것도 한국보다 훨씬 싸지만 특히 이렇게 파머스마켓에서 박스째 사면 더욱 저렴해서 실컷 먹을 수가 있었다.
간혹 단단한 백도나 머루포도가 먹고 싶다며 아이들은 한국의 맛있는 과일들을 그리워했다.
"여기 있는 동안엔 여기서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것들을 실컷 먹어보는 거야.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 그땐 여기서 먹었던 것들이 그리워질걸? 지금 먹을 수 없는 걸 그리워하기보단 지금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누려보자."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호박 카빙을 위해 작은 조각도도 샀다.
플라스틱 호박바구니만 봤던 아이들은 처음으로 진짜 호박 속을 파내고 조각도로 눈코입을 뚫으며 신이 났다.
호박 속을 긁어내는 게 꽤 힘들었던지 큰 호박을 샀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긁어낼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호박씨를 보며 신기해했다.
시간과 공을 꽤나 들여 비록 쉽지 않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 만든 자그마한 잭 오 랜턴을 볼 때마다 아이들은 핼러윈을 더욱 손꼽아 기다렸다.
근데, 너희 진짜 남의 집 초인종 누르고 사탕 받아올 자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