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4
로마가 서양 세계 최강자로 군림하는 동안 나폴리는 제국의 휴양 도시로 남을 수 있었다. 오늘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고대 나폴리의 유적들(교회, 성벽, 폼페이 유적, 카푸아의 콜로세움 등)은 당시 나폴리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로마제국은 476년, 북방민족의 손에 의해 멸망한다. 정확히는 서로마 제국이 점령당한 것이지만, 서양사에서 로마 제국이 로마를 내어주는 시점은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다(로마에서 쫓겨난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나폴리의 빌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이 시점부터 유럽은 ‘암흑기’로 진입한다.
로마의 공백을 매운 것은 게르만족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서고트족이, 북아프리카에는 반달족이, 이탈리아 반도에는 동고트족이, 프랑스에는 프랑크족이 영국에는 앵글로 색슨족이 각각 들어서서 그들의 왕국을 건설한다. 이처럼 게르만 왕국들의 등장과 함께 현대 유럽의 윤곽 역시 드러나게 된다(남경태).
5-6세기 이탈리아사는 끊임없는 전란의 반복이었다. 동고트족과 반달족이 이탈리아를 휩쓸었고, 비잔틴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이탈리아/고토 수복 전쟁(535-554년)이 약 20년간 이어졌으며, 그의 사망 후 고트족의 반격이 반도 대부분을 재탈환했으나 대규모로 남하한 롬바르드족이 이들을 몰아내고 이탈리아에 그들의 왕국을 건설한다(568년).
이처럼 지속된 전쟁은 철저하게 이탈리아를 파괴하고 말았다. 반도 전역에서 인구의 감소, 국토의 황폐화, 문화적 퇴보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문맹률 또한 급증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를 두고 역사가들은 리비아보다 더 텅 빈 땅이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로마에 잔존하는 가톨릭 교회였다. 로마 교회는 행정 체제가 붕괴된 이탈리아에서 제한적이나마 구심력을 발휘했다. 각 지역의 교구에 존재하는 사제들이 점차적으로 정치적 세력을 행사하게 된 까닭이다.
같은 시기, 오늘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다.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는 왕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사제들과 손을 잡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496년). 이렇게 시작된 프랑크족과 그리스도교 교회간의 공생 관계는 훗날, 서기 800년,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가 교황에 손에 의해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이탈리아(남부를 제외한), 프랑스, 카탈루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기에, 이 사건은 서유럽에서 게르만족이 로마를 계승하게 되었음을 공식화하는 동시에, 교황으로 대표되는 신성과 황제로 대표되는 세속의 협업이 성립되었음을 뜻했다. 로마와 같은 확실한 힘과 권위를 갖추지 못한 프랑크 왕국은 드넓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각 주에 자치권을 부여해야만 했고, 이와 함께 각주에 교구가 설치되고, 영주들이 그들의 직속 부대를 편성하여, "기도하는 사람(사제), 지배하는 사람(영주), 싸우는 사람(기사)"의 세 가지 지배 신분과 나머지에 속하는 '일하는 사람'인 농민으로 구성된, 서양 중세의 전형적 지배 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다(남경태).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중세 초기의 청사진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이 시기가 나폴리의 역사가 통상적인 서양유럽 역사의 전체적 흐름과 ‘어긋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서유럽 최대 도시 중 하나였던 나폴리의 행보와 서양사간의 간극은 암흑기를 계기로 나타나게 되고, 놀랍게도 600년 이상 지속된다.
서로마 제국이 오도아케르의 손에 멸망한 476년 이후 나폴리는 다시금 남이탈리아의 중심 항구로 부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남부 이탈리아 최대 항구였던 이웃 푸테올리가 쇠망한 것이다. 굉장한 물동량을 자랑하던 푸테올리는 로마 제정 내내 티레니아해 최대 항구로 활약했으나, 로마의 몰락과 함께 그 호황 역시 끝이 나고 만다. 쇠퇴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도시를 보호해줄 성벽의 부재였다. 전술했듯이 5세기 이탈리아는 여러 이민족의 침공이 끊이지 않던 전장이었다. 성벽이 없는 도시들은 무자비한 약탈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나폴리는 440년 황제 발렌티니안 2세의 명에 따라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해 잔존 성벽을 강화하고, 감시 타워를 설치해 둔 바 있었다. 덕분에 455년 로마가 반달족에 의해 함락당했을 때에도 도시를 지켜낼 수 있었다. 캄파니아 내 살아남은 도시들은 쿠마, 나폴리, 등 견고한 성벽과 지중해로 통하는 항구를 보유한 도시들뿐이었다. 이들은 별도의 무역망/보급선을 통해 게르만족의 침공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냈다. 캄파니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도시로서 나폴리는 주변 지역의 피난민들을 자연스레 흡수했고, 무역항구로서 식량을 포함한 물자를 수입하여 이탈리아로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암흑기의 나폴리 역시 심각한 피해를 겪어야만 했다. 5세기 말 동고트왕국의 테오도르에게 결국 함락당했고,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트족전쟁에서는 벨리사리우스의 비잔틴 군에 정복당했으며(536), 543년에 다시 고트족의 토틸라의 손에 들어갔으나, 9년 만인 552년에는 환관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비잔틴령으로 복귀한다. (나폴리의 성벽은 견고했다. 536년, 벨리사리우스의 비잔틴군은 상륙과 함께 삽시간에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나폴리의 성벽만은 다일간 이어진 공세에도 난공불락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어둠을 틈타 아퀴덕트를 따라 나폴리내로 잠입하여 나폴리 공략에 성공한다. )
이후 나폴리는 553년 비잔틴의 공작령으로 선포되고, 무려 600년간 비잔틴의 영토로 남게 된다. 롬바르드족이 대규모로 남하하여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아우르는 왕국을 건설했을 때에도 나폴리는 끝내 굴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 전역이 게르만 왕국이 구축한 신질서 아래 결집하는 동안, 나폴리는 비잔틴 제국과의 강력한 유대를 바탕으로 구체제에 결속된 채 중세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비잔틴은 분명 서방 세계의 최강국이었으며,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서양문명의 징정한 계승자였다. 문화를 위한 물질적 기반을 잃어가던 서유럽과 새로 등장한 이슬람의 위협 사이에서 비잔틴 제국은 지속적으로 동방과 고대 서양의 유산을 보전/발전해 나아갔다. 반도에서 롬바르드족의 위협을 막아내야 했던 나폴리는 자연스레 콘스탄티노플과의 깊은 유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그리스적인 도시 나폴리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비잔틴 제국 궁정사이 유대는 남다른 것이었다. (이 시기 나폴리는 다시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선포한다) 나폴리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서는 고전 작품들의 그리스어-라틴어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는 나폴리가 이탈리아 전역에서 벌어지던 문화적 황폐화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다만 바다 건너 자리한 비잔틴 황실(비잔틴의 총독부와도 같았던 라벤나 역시 먼 북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라벤나 역시 751년 롬바르드 족에 의해 함락당한다)이 나폴리에 행사하는 행정력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로마와 이웃한 나폴리가 가톨릭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려웠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방문을 계기로 가톨릭 교회는 나폴리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이 그들만의 공동체 사회를 꾸리며 공존하는 나폴리에서 종교적 다양성은 불가피한 현실이었고, 로마 교회는 도시 내에서 타지역과 같은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서유럽 등지에서 게르만족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다양한 민족들이 남부 이탈리아의 마지막 남은 비잔틴의 대도시 나폴리에 정착하고 있었다. 유대인, 아랍인, 게르만, 등 각 인종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구축하여 도시 내에서 생활했고, 이러한 사실은 가톨릭 교회의 구심력이 다른 도시에서와 같은 힘을 갖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도시 중심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 교회가 나란히 서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중앙 정부도, 교회도 시민들의 삶을 책임져줄 수 없는 상황에서 도시 내 행정을 주도한 것은 로마시대부터 내려오던 주요가문들이었다. 전통적인 클리엔테스-파트로누스 관계 (고대 로마의 지연, 혈연 또는 후원관계)로 대표되는 명문세가들의 영향력은 제국 몰락 이후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서는 거의 유명무실해졌으나, 나폴리에서만큼은 유서 깊은 가문들이 주도하는 ‘원로회’의 힘이 여전히 건재했다. 반면 주류에 편승하지 못한 개인들은 중앙 정부에도, 교회에도 그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었기에, 스스로 작은 공동체를 구성하여 자력으로 생존을 꾸려가는 전략을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과 작은 공동체 사회 구성의 경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661년,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스 2세는 나폴리를 직접 방문하여 나폴리인 바실을 나폴리의 공작으로 임명한다. 이로서 나폴리는 사실상의 자치권을 인정받은 공작령으로 거듭난다. 명목상으로는 비잔틴령이었으나, 공작과 주교는 우선적으로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후 황제의 승인 과정을 거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라벤나 함락 이후(751년) 처음부터 제한적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이 유명무실해지었을 때, 나폴리는 독립 공작령으로서 혼자만의 길을 개척하게 된다(763-1140년). 무려 400년 가량 이어지는 이 독립국의 기억은 오늘날까지도 나폴리 사람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