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8
지난 포스트에서는 시칠리아 왕국 건국을 다루었다. 1139년, 루제로 2세는 10년의 고전악투 끝에 그의 가문을 유럽 왕가의 대열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교황과 황제라는 중세 유럽 최강자들을 상대로 올린 쾌거였다. 오트빌 가문이 처음 남이탈리아에 상륙한 지 약 100년 만이다.
그러나 1194년, 오트빌 왕가는 끈질기게 그들을 괴롭혀온 신성로마제국으로 흡수된다. 전투가 아닌 정략혼인의 결과였다. 루제로(2세)의 아들(구이엘모 1세, 통치 기간: 1154-1166)과 손자(구이엘모 2세, 통치 기간, 1166-1189)까지 이어지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좌는 이후 호엔슈타우펜의 후계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데리코 2세(1198-1250)의 것이 된다. 이로써 나폴리 역사 역시 호엔슈타우펜의 계보와 함께하게 된다.
다음 포스트에서 페데리코 2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다만 그전에 이 시기 남부 이탈리아사의 특이점을 살펴보려 한다. 현재 나폴리 역사 서술의 일환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다만 당시 전 유럽의 이목이 집중돼 있던 지중해에 위치한 나폴리의 상황은 국제 정세와 단단히 맞물려 있었다. 도시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시칠리아 왕국과 당시 유럽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이유다(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시칠리아 왕국 점령은 유럽 전체 정세를 뒤흔들어놓은 사건이었다). 응당 당시 나폴리가 겪고 있던 혼란은 극심했고, 이를 두고 20세기 나폴리의 사상가 베네데또 크로체는 영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정복왕 윌리엄'과 ‘세계의 공포 쥐스카르'라는 외지인이 무력으로 통일한 국가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하나의 통합된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영국에 비해 시칠리아 왕국은 각 지역과 도시들 간의 정치, 문화적 괴리를 아우르는 중앙 집권 국가를 탄생시키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는 여러 요인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의 대립이라는 분쟁이다. 황제와 교황 간의 힘겨루기는 중세 전체를 걸쳐 이어진 갈등이다. 이탈리아가 그 중심무대였다. 황제와 교황이 이탈리아의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황제파와 교황파의 이름으로 이탈리아의 국가, 도시, 가문들은 지속적으로 분열하고 있었다(이에 비해 당시로선 변방 국가에 속했던 영국은 직접적인 영향권 바깥에 있었다).
이 갈등의 중심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라는 문서가 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를 포함한 서유럽 전체를 교황에게 기증했음을 명시하는 칙서로서, 교황에게 있어선 황제를 포함한 모든 봉건 영주 위에 교황이 군림하며, 세속의 모든 권력 역시 오직 교황이 하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증서였다(훗날 르네상스 시대에 이 칙서는 교황청이 위조한 가짜칙서임이 밝혀진다). 물론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황제는 없었다(문서의 진위여부를 정면으로 부정한 황제도 없었지만). 중세 황제와 교황의 관계는 당시 정세에 따라(특히 황제가 누구인가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절대 권력자는 황제이지만, 그 위에 영적 권위자인 교황이 군림하는 이 모호한 주종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인물은 교황청 쪽에서도, 제국 쪽에서도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둘 사이의 갈등은 중세의 고질적인 문제로서 지속적으로 유혈사태를 야기하고 있었다.
절대적 권위에도 불구하고 10-12세기 교황의 자리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선출권력인 교황을 결정하는 투표 과정은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안이었고, 원하는 후보를 교황 자리에 앉히려는 로마 귀족,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마 시민들의 입김은 그저 높은 관심에 그치지 않았다. 각자 그들이 포섭한 추기경들을 앞세워 치열한 암투를 벌였고, 분쟁은 때때로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후보가 제거되거나, 심지어 교황이 살해되는 일 역시 종종 벌어졌다. 이 시기 교황들이 로마에서 생활하는 일을 꺼린 현상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로마 귀족 가문 크레센티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교황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살해당한 베네딕트 6세(974), 베드로성당에서 황제의 손에 사로잡혀 옥살이를 해야 했던 파스칼 2세(1111)(당시 그를 구하기 위해 카푸아의 노르만 군주 로베르 1세가 달려왔으나, 제국군에 패배했다) 로마 공화정 세력과의 군사적 충돌에서 바위에 맞아 사망한 루시우스 2세까지(1145), 오늘의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연유로 교황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교황의 가장 강력한 적은 단연 지상의 통치자 황제였다. 카노사의 굴욕이 좋은 예시였다. 카노사에서의 치욕(1077)을 설욕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한 헨리 4세 앞에서(1084) 교황은 7년 전의 근엄함이 무색하도록 속수무책이었다. 만약 쥐스카르가 노르만군을 이끌고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황제의 손에 포획당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귀향하는 노르만군과 함께 로마를 떠나 노르만 치하 살레르노에 숨어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자연스레 중세 교황은 늘 자신을 보호해 줄 강력한 우방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학자들은 1130년 시칠리아 왕국 출범을 교황청이 기획한 사건으로 설명한다. 이탈리아 남부에 제국의 라이벌 세력을 등장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꾀하는 교황청의 기지였다는 주장이다. 쥐스카르, 루제로를 비롯한 노르만 영주들과 교황청 사이 벌어진 치열한 전투들을 떠올린다면 다소 무리한 주장이라 느껴진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 동쪽의 비잔틴 제국, 로마의 공화정/원로원 사이에서 활로를 뚫어내야만 했던 교황청이 시칠리아 왕국에 거듭해서 기대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선 교황과 시칠리아 국왕의 관계는 교황과 황제 사이 그것과는 달랐다. 전술했듯이 형식적으로 황제는 교황의 신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공공연히 시인하는 황제는 드물었다. 반면 노르만의 영주들은 모두 교황청의 인가를 통해서 정식 영주로 임명된 인물들이었다. 로베르 쥐스카르의 풀리아 공작 작위, 루제로 2세의 시칠리아 왕국 왕위 모두 교황청이 최초로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교황은 노르만 정복 전쟁 초기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부 이탈리아/시칠리아 왕국이 교황이 하사한 봉토이며 그 진정한 통치자 역시 교황임을 여러 차례 명시해 두었다. 황제-교황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왕국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 경쟁국 교황청의 군주인 교황의 신하라는 괴상한 지배 구조, 특히 교황의 내정간섭과 지원요청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는 루제로와 그의 후손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사안이었다. 실상인즉 지난 포스트에서 살펴봤듯이 변덕을 부리기 십상인 교황청을 상대로 오트빌가문은 종종 창을 들고서 그들의 영토를 지켜내야만 했다. 그들의 주군인 동시에 적이기도 했던 교황이 시칠리아를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이상, 평화는 오직 힘으로 쟁취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세속 군주들의 입장에서도 교황은 골치 아픈 존재였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있어선 그의 영토인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로마’ 황제의 자리는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하는 것이었다) 제멋대로 ‘야만족’ 노르만에게 넘겨주고서 그 뒤에 숨어 제국을 견제하는 교황의 작태는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만은 강력한 황제가 제위에 오를 때면 무력시위로 격화되곤 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인물이 바로 페데리코 2세의 할아버지가 되는 바르바로사(1122-1190), 붉은 수염의 황제다. 여섯 번의 이탈리아 원정을 직접 이끌 만큼 이탈리아를 향한 강한 의지를 보였던 그는 반도의 패권을 두고 교황청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바르바로사가 처음부터 교황청을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되려 집권 초기 황제와 교황 아드리아노 4세의 관계는 호의적이었다. 1155년, 바르바로사는 로마를 코무네(공화정) 세력에 빼앗긴 교황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한다. 제국군의 호위 속에서 베드로성당에 입성한 교황과 황제는 우선 그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린다. 이후 바르바로사는 무력으로 로마를 평정하고, 코무네 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인 브레시아의 아르놀도(가톨릭 교회와 교황청이 세속적 권력을 포기해야 함을 주장하며 공화정 세력을 이끌었던 롬바르디아 출신의 대성당 참사회 의원)를 포획하여 교황청에 넘긴다(그는 교황청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다). 교황의 신하로서 로마를 토벌하여 교황청에 바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둘은 협정을 통해 황제는 교황청의 적을 타도하고, 교황은 제국의 적을 신의 이름으로 파문하며, 둘 중 어느 쪽도 단독으로 제삼자(비잔틴, 시칠리아, 로마 원로원)와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결의에 합의한다.
그러나 길조로운 시작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신뢰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들은 사사건건 신경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표면적으로나마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국제 정세에 파장을 가지고 왔다. 우선적으로 이 변화는 시칠리아 왕국이 소외되었음을 의미했다(이탈리아 왕을 겸임하는 황제가 노르만 왕국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럴 때면 노르만족은 교황청 남쪽 국경을 위협하는 위협적인 적으로 변모하곤 했다. 실제로 같은 해 구이엘모 1세(루제로 2세의 아들)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이 교황청의 영토를 넘보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아드리아노는 즉시 바르바로사에게 출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긴 이탈리아 원정에 지쳐 고향으로 귀환하기를 원하는 기사들의 요청을 묵살할 수 없었던 바르바로사는 독일로 말머리를 돌렸다.
주종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은 교황과 황제 사이 큰 반감을 야기하곤 했다. 황제는 교황을 위해 로마를 수복한 것만으로도 그의 책임을 다 한 것이라 믿었다. 반면 스스로가 황제의 주군이라 믿고 있는 교황은 구원요청을 외면하는 황제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1157년 명확해진다. 계기는 교황의 사신이 황제와 그의 측근들이 모인 의회에서 교황의 서신을 읽어내려 간 사건이었다. 서신에서 교황은 황제를 휘하 봉건 영주처럼 호명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교황의 은총을 받고자 한다면 황제가 행실을 올바르게 해야 할 것이라 꾸짖는다. 듣고 있던 모든 영주들이 격분하였고, 황제 휘하 공작인 위텔바흐 가문의 오토가 사신을 향해 칼을 뽑는 사건이 벌어졌다. 황제가 직접 그를 말려야 했고, 황제파 영주들 모두가 교황을 비난하고 나섰다. 사제들마저 교황에게 그의 실수를 지적했다. 결국 교황이 황제에게 그의 뜻이 와전되었다며 사과의 뜻을 전달함으로써 겨우 사건은 일단락되지만 둘 사이 깊은 불신의 골이 재확인된 셈이었다. 황제와의 불화는 결과적으로 교황이 황제와의 동맹관계로부터 등을 돌리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1156년, 교황은 노르만의 위협을 잠재우기 위해 베네벤토에서 시칠리아 왕국과 동맹을 체결한다. 교황청으로선 불가피한 조치였을지 모르나 시칠리아와의 독자적 협상 타결은 황제와의 협약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오트빌 가문의 남이탈리아 통치에 대한 교황청의 인준을 의미했다. 바르바로사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도발과도 같았다. 황제의 반응을 예상한 교황은 곧 시작될 황제와의 전쟁에 앞서 그의 남진을 가로막을 추가적인 동맹국을 탐색한다. 결국 그는 1159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의 도시들로 하여금 황제를 상대로 반기를 들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 해 아냐니에서 훗날 롬바르디아 동맹으로 발전하게 되는 롬바르드 도시 연합이 결성된다. 밀라노, 피아첸차, 크레마, 브레시아, 시칠리아 왕국의 대표들이 참석한 회담에 직접 참석한 교황은 그들과 함께 반-바르보로사의 기치를 들면서 40일 후에 황제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모든 것이 바르바로사를 견제하려는 교황의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로써 교황청-제국은 공공연한 적대 관계로 돌입한다. 다만 아드리아노는 황제를 파문하지 못한 채 다음 달인 9월에 사망한다. 교황청-바르바로사 간의 갈등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아드리아노와의 분쟁을 통해 황제에 적대적인 교황의 존재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바르바로사는 다음 교황만큼은 친-황제 성향의 인물이어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는 원하는 바를 현실화하기 위해 직접 손을 쓰게 되고, 이러한 황제의 결정은 이탈리아를 새로운 전란으로 몰고 가게 된다.
차기 교황은 서른 명의 추기경의 투표로 결정되는 것이 수순이었다. 1159년 9월 5일 열린 교황 선거 회의(콘클라베)가 열렸고, 27표를 받은 시에나의 롤란도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된다. 관례적 의식이 뒤따랐다. 몇 번의 형식적인 거절 끝에 롤란도가 승낙의 뜻을 밝히자, 사제들은 교황을 상징하는 진홍색 망토를 꺼내었다. 그런데 머리를 숙인 롤란도에게 망토가 하사되는 순간, 반대표를 던진 세 추기경 중 하나인 옥타비안 추기경(그는 대표적인 황제파 추기경이었다)이 그를 덮쳤다. 롤란도에게서 교황의 망토를 낚아챈 것이다. 뒤따르는 소동 속에서 옥타비안은 교황의 망토를 스스로 쓰려고 시도한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나머지 추기경들이 옥타비안을 저지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소동 속에서 옥타비안은 망토를 놓쳤으나 그의 수하 교회사가 마치 준비된 것인 마냥 또 다른 진홍색 망토를 꺼내 들어 옥타비안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그것을 걸치는 데 성공한 옥타비안은 망토를 목에 허겁지겁 감고서 교황의 자리로 돌진하여, 권좌에 앉아 그가 새로운 교황 비토리오 4세임을 선언했다. 곧장 바깥으로 향한 그는 새 교황의 등장을 기다리던 사제들을 향해 그가 새로운 교황임을 선포했고, 사제들은 그의 이름을 선창하며 시민들에게 새 교황 탄생의 소식을 알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또 한 번 교황청의 권좌는 교황 알레산드로 3세(롤란도 추기경)와 대립 교황 비토리오 4세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분열한다. 정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이 사건은 제국이 계획한 교황 찬탈 작전임이 분명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황제로서는 아쉽게도 비토리오는 단 며칠간 교황으로 군림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건의 자초지종이 알려지면서, 로마 시민을 비롯한 전 유럽이 모두 알레산드로 편에 선 것이다. 비토리오 지지를 고집한 것은 오직 바르바로사뿐이었다. 수세에 몰린 황제는 결국 힘으로 모두를 굴복시키기로 결심한다. 다시금 나선 이탈리아 원정에서 바르바로사는 1160년 크레마를 불태우고, 1162년 밀라노를 초토화시키고서, 교황청과 시칠리아를 평정하기 위해 1167년 알프스를 넘는다. 이번에야말로 황제파 교황(비토리오는 1164년 루카에서 사망한다. 황제파 추기경들은 곧 차기 교황인 파스콸레 3세를 선출하고 황제는 이를 인준한다)을 성 베드로에 안착시키고, 이탈리아 전체를 제국령으로 통합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의 병사들 앞에서 로마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황제군은 로마, 그것도 바티칸의 중심까지 단숨에 진출했다. 뒤따른 것은 처참한 살육이었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성 베드로 성당에서 그와 같은 참상을 자행하지는 못했다. 9세기 사라센의 침범 당시에도 성당 내부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드로 성당 내 최초의 집단 살상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통치자 황제에 의해 연출된 것이다. 시체들이 교회 바닥을 뒹굴었고, 제단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교황은 순례자로 변장하여 겨우 로마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알레산드로는 시칠리아 왕국 관할의 베네벤토로 피신한다. 그러나 남이탈리아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바르바로사의 다음 행선지가 바로 시칠리아 왕국이었다. 바르바로사는 로마에 머무르며 다음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복욕으로 불타는 그에게 결정적인 불운이 찾아오고 만다. 그의 병영에 역병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라리아로 추측되는 이 전염병은 순식간에 그의 병사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바르바로사는 병사의 대부분이 사망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성 베드로 성당을 능욕한 황제에게 떨어진 신의 벌이라 믿었는데, 이는 잠시나마 수세에 몰려있던 교황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제 황제로서는 모든 원정을 포기하고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로의 퇴각조차 더 이상 간단하지 않았다. 황제가 수세에 몰렸음을 눈치챈 이탈리아 영주들이 교황 편으로 돌아섰고, 북부 도시 중 다수가 병사를 일으켜 독일로 향하는 황제의 퇴각길을 막고 나섰다. 황제는 병사들을 모조리 잃은 초라한 꼴로 가까스로 독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원정의 결과는 처참했다. 바르바로사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한 그였지만 한번 승리를 맛본 적들은 더 이상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알레산드로 지지 입장을 굳힌 롬바르디아 동맹, 시칠리아 왕국과 교황청을 모두 적으로 삼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바르바로사는 1176년 레냐노에서 벌어진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완벽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 패배는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 통일은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하고, 결국 다음 해인 1177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국, 교황청, 롬바르디아 동맹, 시칠리아 왕국 간의 평화조약으로 이어진다. 교황과 황제는 중립국 베네치아에서 서로 눈물 어린 포옹을 나누며 그간의 분쟁을 일소시킨다.
베네치아에서 합의된 종전은 1190년 바르바로사가 십자군 원정에서 사망하면서 확실시된다. 그는 결국 이탈리아 정복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오늘날 터키에 위치한 살레프 강에서 익사했다. 그러나 그는 역사에서 실패자로 남지 않았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군주의 사망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일반적인 패턴과 달리 그의 왕국은 그의 사망 직후 갑작스러운 영토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바르바로사가 사망하기 전 시도한 마지막 회심의 한 수가 먹혀들어갔기 때문이다. 1186년 성사된 그의 아들 엔리코(헨리 6세)와 루제로 2세의 딸(당시 30세의 과부이자 국왕 구이엘모(루제로 2세의 손자)의 고모) 콘스탄체 간의 혼인이 그것이었다(1186). 말년에 이르러서야 황제는 무력이 아닌 외교전의 힘을 깨달았던 것이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동맹국을 원했다. 변덕이 심한 교황이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노릇이었다(다음 교황이 누가 선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교황청과의 평화 협약은 영구적일 수 없었다). 구이엘모(루제로 2세의 손자)는 우선적으로 비잔틴과의 혼인을 원했으나, 무산된 바 있었다. 그러던 와중 바르바로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엔리코와 서른 살이 다 된 왕의 고모 콘스탄체(루제로 2세의 딸)의 혼인 제의가 찾아왔다. 외교를 통해 이탈리아 정복이라는 오랜 꿈을 이루고자 한 바르바로사의 뜻과 강력한 동맹국을 찾는 시칠리아의 속셈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당시 교황 자리에 있던 우르바노 3세(알레산드로는 1181년 사망한다)는 뒤늦게 이 결혼을 극구 반대하고 나선다. 구이엘모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만약 엔리코가 콘스탄체의 남편으로서 시칠리아 왕관을 상속받게 된다면, 이는 신성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통합을 의미했다. 어떻게 해서든 사단에 저지해야만 하는 전개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콘스탄체와 엔리코는 1186년 1월 27일, 밀라노 성 암브로지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밀라노라는 선택 역시 상징적이었다. 끈질기게 황제에 저항해 온 롬바르디아의 도시들 앞에서 제국-시칠리아의 동맹 성사를 과시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꺾으려는 바르바로사의 계획이었다.
1189년 구이엘모 2세가 사망하면서 교황청의 우려는 현실이 된다. 시칠리아 왕국을 이어받을 적통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남은 후보는 오직 콘스탄체의 남편이자 제국의 차기 황제인 엔리코 6세뿐이었다. 교황, 롬바르디아 동맹, 남이탈리아의 영주들로서는 끔찍한 결과였다. 다만 그들에겐 아직 시간이 있었다. 독일에 머물고 있던 엔리코가 시칠리아로 내려와 왕좌를 그의 것으로 선언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 틈을 타 시칠리아 영주들이 간교를 발휘한다. 그들이 낸 해답은 루제로 2세의 맏아들 루제로 3세의 사생아 탄크레디였다. 그들은 재빠르게 그를 새 왕으로 옹립하고서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엔리코로부터 그들의 자치권을 사수하기로 다짐한다. 클레멘테 3세 역시 재빠르게 탄크레디를 새 국왕으로 인준한다. 교황청이 다시금 제국에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시칠리아 왕좌는 이론적으로는 엔리코의 것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독일에서 보낸 그에게 있어 남이탈리아는 미지의 땅이었다. 어떤 위험이 따를지 몰랐다. 그의 측근들 역시 엔리코에게 시칠리아행을 미룰 것을 간언 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바르바로사의 강한 의지를 이어받은 남자였다. 아버지가 그랬듯 그는 필요하다면 충분히 잔인해질 수 있었다. 응당 자신의 몫이어야 할 땅을 교황과 노르만 영주들이 빼앗아가려 한다는 소식은 그를 분노하게 하기 충분했을 테다. 그는 곧장 남이탈리아로 향한다.
시작은 순탄지 않았다. 남진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나폴리의 높은 성벽이었다. 농성하는 적군의 사기는 높았고, 제대로 된 해군이 없었던 엔리코는 나폴리의 보급로조차 제대로 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엔리코로서는 무한정 공성전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가 갓 황제로 즉위한 독일 내 영주들의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결국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우선 독일로 귀환하기로 한다. 다음 원정은 급한 일을 처리하고서 진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엔리코는 귀환한 독일에서 반기를 드는 영주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그중에는 그가 처형한 성 리에주의 주교와 같은 성직 영주들도 있었다) 그의 입지를 단단히 한다. 이 시기 공교롭게도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귀국길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5세에게 사로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엔리코는 그를 넘겨받아 15,000마르크의 몸값을 받고서 영국 왕정과 교환한다(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을 위해 시칠리아를 방문하는데, 그 과정에서 탄크레디와 동맹을 맺은 바 있었다. 엔리코는 이를 잊지 않았고, 그의 포획-투옥은 이에 대한 복수였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큰 금액이었는데, 그는 독일 내 영주들의 불만을 이 돈으로 일시적으로 해결한다. 이제 남은 것은 시칠리아 왕국뿐이었다.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1194년 2월, 때마침 탄크레디가 사망한다. 엔리코에게 경쟁자가 사라진 셈이었다. 탄크레디 지지 세력은 그의 아들 구이엘모 3세를 새 군주로 옹립하지만 그는 고작 일곱 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같은 해 8월 남부 이탈리아로 향한 엔리코는 4개월 만에 왕국의 주요 영토를 모조리 정복하고서 1194년 크리스마스,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물론 지역 내 반대세력이 완벽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엔리코에게 더 이상 그들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1197월, 엔리코는 구이엘모 3세를 지지했던 노르만 영주들을 모조리 살해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명을 내려 아직 소년에 불과한 구이엘모를 거세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여태껏 전례가 없었던 그의 이러한 잔인행위는 모두를 경악하게 했는데, 같은 지역 출신인 그의 아내 콘스탄체마저도 이후 남편을 향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오직 ‘독일인’만이 할 수 있는 잔인행위라는 것이 그들의 평가였다.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과 남이탈리아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경쟁자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던 그다음 날인 1194년 12월 26일, 엔리코와 콘스탄체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바로 훗날 페데리코 2세로 그 이름을 알리게 되는 페데리코 루제로 코스탄티노였다. 호엔슈타우펜의 영웅 바르바로사와 오트빌가의 영웅 루제로 2세의 이름을 부여받은 이 아이보다 제국의 앞날에 더 큰 축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