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13
남부 이탈리아에서 중앙집권 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페데리코에겐 또 다른 과제가 있었다.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다. 중세 유럽 세속의 절대자로서, 황제인 그에겐 십자군을 이끌고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초대 십자군인 제1차 원정에 의해 수복된 그리스도교의 성지는 1188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 의해 함락된 이후 5차까지 이어진 원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슬람 영토로 남아있었다. 교황청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할 6차 십자군을 페데리코에게 주문하고 있었다.
중세 교회의 권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십자군보다 더 좋은 예시는 없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장으로서 지상의 통치자인 카이사르를 중동으로 출동시키며, 성전에 나서는 병사들을 축복하는 동시에, 전사자 모두에게 면죄부와 천국을 약속하는 명예로운 순간을 욕망하지 않는 교황은 없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페데리코를 지원한 대가로 그에게서 목숨을 건 원정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만 지난 포스트에서 서술한 대로 집권 초기 페데리코는 시칠리아 왕국 재건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중 1222년부터 수년간 이어지는 사라센 세력과의 전쟁은 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는 자국 내 이슬람 세력을 먼저 굴복시켜야 했고, 십자군 원정은 거듭해서 연기됐다. 이는 그의 출정을 오매불망하는 교황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실상 십자군을 둔 교황청과의 갈등은 그가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1215년 독일 아헨에서 로마의 왕 즉위식에서 갑작스레 십자군을 이끌고서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겠음을 신 앞에서 맹세한 것이 바로 페데리코였다. 이 돌발 선언의 동기를 두고 역사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평소 누구보다 냉정한 그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것이 오토를 상대로 기적적인 승리를 일구어낸 황제의 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넘겨짚는다. 그러나 정황상 그의 십자군 출정 맹세는 전략적 계산에서 비롯된 한 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출발을 한참 앞둔 시점에서 발표하는 ‘출정 선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이를 통해 교황청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로마에서 이루어진 황제 즉위식, 아들 엔리코의 로마의 왕위 등극, 페데리코의 남부 귀환과 제후 세력 축출은 모두 교황청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십자군 원정이라는 협상 카드는 필수적이었다.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교황에게 더 큰 희소식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 정신이 팔려있고, 스페인은 자국 내 이슬람 세력을 상대하는 데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제6차 원정을 이끌 군주는 황제뿐이었다. 시칠리아 왕국 평정과 사라센 반란 진압 등을 이유로 거듭해서 십자군 원정을 미루던 페데리코도 결국 산 제르마노에서 이루어진 협상에서 1227년 8월에 출정하겠음을 교황에게 약속한다. 이번에도 출정을 미룬다면 파문 선언이 떨어지리라는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요구되는 십자군 원정을 현실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페데리코는 독일과 시칠리아 내 영주들을 총동원해야 했다. 그의 심복 헤르만 본 살차가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영주들을 뇌물로 설득했고, 중앙집권 체제가 완비된 시칠리아 왕국에서는 새로운 세금이 징수되고 군사 동원 명령이 떨어졌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페데리코는 1225년 7월, 이듬해 부활절 크레모나에서의 디에타(회의) 개최를 선언한다. 독일과 시칠리아의 모든 영주들을 한 곳에 소집하여 십자군 원정을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대표적 황제파(기벨린) 도시 크레모나의 선택은 출항 전 밀라노를 비롯한 롬바르디아의 구엘프파 도시들에게 제국의 힘을 과시하려는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페데리코는 계산착오를 하고 만다. 그 답지 않은 실수였다. 전통적으로 호엔슈타우펜을 상대로 적개심을 품고 있던 롬바르디아의 경계심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는 디에타를 통해 평화로운 방식으로 북부 자치도시들의 기를 꺾어주려 했다. 그러나 도시들은 이를 그들 생존을 위협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카푸아 헌장으로 대표되는 남부에서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주시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만약 북부에서도 같은 시도가 이루어진다면 가장 먼저 축출될 것은 도시를 통치하는 제후세력임이 자명했다. 원정을 앞두고 새로운 무력분쟁을 일으킬 의사가 없었던 페데리코는 회의 개최가 일으킬 과민반응을 내다보지 못했다. 오랜 세월 호엔슈타우펜이라는 강자 앞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던 약자의 불안을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결국 크레모나 디에타는 롬바르디아 동맹 부활이란 결과를 낳았다. 연합 도시들은 당장 군사를 일으켰고, 디에타가 애초에 열리지 못하도록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통하는 길을 모조리 막아섰다. 제후들이 크레모나로 모일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만약 이런 반응을 예상했더라면 페데리코는 대군을 동원하여 이들의 의지를 꺾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동반한 군대는 롬바르디아 동맹과 승부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미치지 못했다.
크레모나 디에타는 성인 페데리코가 맛본 최초의 패배로 남게 된다. 그는 십자군 원정을 앞두고 제후들을 소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들 엔리코(로마의 왕으로서 독일에 남아있었던)와의 재회 역시 추후로 미뤄야만 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롬바르디아 동맹 결성과 디에타의 실패라는 단발 사건이 아닌, 훗날 더 복잡한 문제로 불거지게 된다. 롬바르디아의 그 어떤 도시보다 더 강력한 적 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등장이 그 연유였다.
1227년 교황으로 즉위하는 그레고리우스 9세는 당시 이미 82세의 노인이었다. 그는 황제 즉위식에서 직접 페데리코에게 십자가(십자군 원정을 의미한다)를 건네주었던 친 페데리코 성향의 남자였다. 당시 황제로서는 새 교황의 등장에 각별한 위협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교황에 선출된 순간 그의 태도는 몰라보게 달라진다. 교황청의 권위를 위협하는 모든 적을 척살하려는 열정에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 그리스도교 대표 성인 중 하나인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각종 이단이 성행하는 종교적 기류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권위를 높이 세울 길을 모색했다.
그런 그가 그 어떤 이단보다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 믿었던 존재가 바로 페데리코였다. 십자군 원정을 최우선시했던 호노리우스와는 달리 그는 페데리코의 실각이 교황청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 믿었다. 독일과 시칠리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페데리코의 야망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교황청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임을 가장 먼저 내다본 것이 그였다.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십자군 원정을 지연시킬 가능성을 무릅쓰고 롬바르디아 동맹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크레모나 디에타 사건 당시 북부 도시들이 페데리코를 상대로 공공연히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것도 교황청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역시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페데리코가 동방으로의 출정을 연기하고 싶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은 없었다. 그러나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페데리코는 십자군 원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페데리코에게도 십자군 원정의 책임을 회피할 의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대외적으로는 신도였으나, 대체 그에게 신앙심이란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페데리코는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교와 거리를 두었던 황제였다. (좋은 예시로 그는 왕국 전역에 활발하게 건축 사업을 추진했지만 그의 치세 내 건설된 교회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어린 시절 그를 정적들의 손에 방치한 교황청을 향한 뿌리 깊은 반감을 품고 있던 그가 교황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희생을 자청했을 리도 만무했다. 그렇다면 교황청도, 신앙심도 아닌 무엇이 그를 동방으로 이끌고 있던 것일까.
우선 그는 황제와 제국의 명예를 중요하게 여겼던 남자였다. 스스로를 카이사르, 알렉산드로스와 비교했던 페데리코였다.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는 서방의 절대자라는 전통적 영웅상을 탐낸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십자군 원정은 교황청뿐만 아니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숙원이기도 했다. 그의 할아버지 바르바로사가 5차 원정에서 익사했고, 아버지 엔리코 역시 십자군 원정 준비 중 사망했다. 그에겐 가문의 과업을 완수할 의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역대 황제 그 누구보다 동방 문화가 친숙했던 남자였다. 아랍어에 능하고, 이슬람 궁중 문화와 아랍에서 보급된 수학과 철학을 사랑했던 그로선 동방은 호기심을 돋우는 유혹의 땅이었다.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페데리코를 정확히 파악했던 셈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성지를 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제로서, 호엔슈타우펜가의 명예를 위해 출전하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피할 수 없다면, 이를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에 활용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그가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한다면 교황청에게 득 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게 그레고리우스의 믿음이었고, 이는 틀리지 않았다.
결국 1227년 8월 페데리코는 브린디시항에서 출항을 알린다. 1000명의 기사를 비롯한 대군과 순례자들이 함께하는 대규모 원정이었다. 이를 위해 독일과 시칠리아의 제후들이 동원한 천 명의 기사단이 출정하였고, 시칠리아 왕국의 갤리선이 총동원됐다. 개혁이 한창인 신생왕국을 뒤로하고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는 동방출정이었다. 목표는 예루살렘 탈환이었다. 투턴, 템플라, 병원 기사단이 모두 집결하였다. 롬바르디아의 방해공작을 감안한다면, 당시로서는 가능한 제국의 모든 자원이 총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교황과 황제는 천문학적 인파가 지중해의 작은 도시 브린디시에 몰리면서 야기될 문제점을 예상하지 못했다. 여름철 유행하는 전염병이 창궐한 것이다. 순례객과 동원된 군사 대부분이 남부 이탈리아 기후가 익숙지 않은 독일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치명적이었다. 더위가 한창인 8월 출항을 계획한 실수는 십자군 원정을 출발도 전에 좌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수많은 순례객, 병사, 기사들이 쓰러졌고, 선봉대장 겸 야전사령관을 맡기로 돼 있었던 튀링겐의 로이스 4세가 열병으로 사망했다. 페데리코 역시 열병으로 쓰러졌다. 그럼에도 그는 출정을 고집했지만, 페데리코의 건강 상태는 심각했다. 그는 우선 헤르만 본 살차로 하여금 대신 선단을 인솔하게 했다. 자신은 그 뒤를 떠나기를 고집했다. 그러나 몸 상태가 거듭 악화되었고, 결국 가신들의 진언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폴리 인근 포추올리에서 요양하기로 결정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포기한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상태는 진정 위독한 것이었다. 하마터면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못하고 십자군 원정에서 익사한 할아버지의 뒤를 따를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예루살렘 탈환보다 황제의 권위 실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교황에게 이 소식이 전해진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에 착수한다. 해명을 위해 찾아온 페데리코의 사신들의 접견을 거부하고서 곧장 황제의 파문을 선언한 것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황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교황과의 계약에 예외 조항은 없었다. 약속된 날짜에 출발하지 못한다면 파문이 떨어지리라는 것은 합의된 내용이었다. 페데리코는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파문은 시작일 뿐이었다. 교황은 노골적인 음해 공작에 착수한다. 우선 그레고리는 파문 철회에 필요한 합당한 속죄 절차를 묻는 황제의 문의를 거듭 묵살했다. 그에겐 파문을 거둘 의사가 없었다. 되려 그레고리우스는 페데리코에겐 애초에 원정을 떠날 의향이 없었으며, 팔레르모의 향락에 사로잡혀 십자군 원정의 실패를 원했고, 이를 위해 작은 항구 브린디시에서 무더위가 극심한 8월 출항을 결정했으며, ---도 그가 살해했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페데리코가 동원한 군사가 약속한 천 명의 기사에 훨씬 못 미쳤으며, 십자군에 사용한 금액도 약속한 것보다 한참 모자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내용을 교서에 명시해 파문 선언과 함께 전 유럽으로 유포시켰다.
모두 명백한 누명이었다. 페데리코는 열병에 걸려 출정에 떠나지 못한 점을 제외하면 교황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막무가내였다. 황제가 약속한 병사를 모두 동원했으며, 비용 역시 그 이상을 지불했고, 브린디시에서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원정을 감행하려 했다는 시칠리아 사제들과 신하들의 해병은 모두 묵살됐다. 교황은 오직 파문 선언을 반복할 뿐이었다. 점차적으로 그는 십자군 원정은 부차적인 문제임을 밝히며 입장을 바꾼다.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페데리코의 시칠리아 왕국 통치권을 문제시했고, 시칠리아 왕국에서 실행되고 있는 정책을 비판했으며, 페데리코가 시칠리아 교회를 사유화하고, 제후들을 부당하게 추방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엄연히 교황청 소속인 시칠리아 왕국이 이제 교황청의 속국이 되어야 함을 선언한 것이다.
페데리코는 난관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교황의 속셈은 명백했다. 유언비어와 가짜 혐의를 통해 언론전을 전개하고 있는 교황은 그리스도교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거부한 황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에게 참회할 기회를 거부하여 파문을 철회하지 않음으로써, 페데리코로부터 십자군 원정을 통해 민심을 되찾을 기회를 거부하고 있었다. 전 유럽인들은 황제가 이미 여러 차례 십자군 출정을 연기해 왔음을 알고 있었다. 신도인 그들은 성지순례의 꿈을 갖고 있었고, 이를 실현시켜주지 않는 황제를 원망하고 있었다. 만약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시칠리아 왕국 내 권위 실추도, 최종적으로는 황제의 폐위까지도 시간문제일 터였다.
그리스도교 수장과의 불화는 그 연유를 막론하고 불손함이라는 오명을 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손 놓고 교황의 유언비어를 묵언하다가는 사태는 돌이킬 수 없어질 게 뻔했다. 민심이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황권을 지킬 수도 없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는 전 세계를 상대로 그의 반론을 제시한다. 바로 훗날 유명해지는 그의 친서였다. 유럽의 군주, 제후, 사제들을 대상으로 그를 음해하는 교황의 교서에 대한 반박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원정 실패에 관한 교황의 비판은 음해공작에 불과하며, 되려 교황이야말로 십자군 원정을 가로막는 십자군의 적임을 명시했다. 그는 교황이 크레모나 디에타를 가로막은 롬바르디아 동맹의 반역행위를 묵인했으며, 시칠리아 왕국 내 반란 세력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고, 이 모든 것이 십자군에 투입돼야 할 자금을 빼돌려 황제를 견제하는 데 남용하는 이교도적 행위임을 지적했다. 이 서신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교황이 십자군에 쓰여야 할 자금을 남용하고 있다는 혐의는 그레고리우스로서는 반박하기 어려운 신랄한 공격이었다. 그 반응 또한 심상치 않았다. 교황청의 심장인 로마에서는 시민들과 원로원의 요구로 이 편지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낭독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제 황제만큼이나, 교황 역시 그리스도교 세계 내 민심을 걱정해야 될 입장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데리코는 변론만으론 교황과의 여론전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다음 해인 1228년에 다시 십자군 원정을 떠나겠음을 명시했다. 교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교황청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지탈환에 임하겠음을 밝힌 것이다.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그레고리우스에게 파문을 철회할 의사는 없었고, 황제도 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십자군 원정이 현실화된다면, 교회의 축복이 없는, 천국이 약속되지 않은, 파문 황제의 십자군 원정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