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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어 모지민 Feb 05. 2023

가을 아침

가을 아침 제법 선선한 바람에 맞은 꽃이 춥다고 아우성이다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던 그토록 무더운 여름은 보란 듯이 나 몰라라 토끼고

사실 나는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갈 때에 나는 계곡이 있는 산속 그늘 속으로 숨는다

대체로 우울한 음악을 듣고 부정을 이고 사는 나는 어둠의 자식인 것일까

사계절 중 어느 때보다 볕이 강한 가을은 넉넉지 않은 시간이라 온 지도 모르게 지고

유난히 질긴 겨울이 찾아온다

가을은 깊어지고 높아지고 삼라만상 무르익어가는 시간

그 계절에서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붉게 익은 단풍을 보고 싶다

작년 가을 이곳으로 처음 이사와 집 옆 권율장군묘에서 바라본 나무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 무성하게 번진 붉은 이파리들을 또렷이 아주 또렷이 기억한다

자전거를 타고 일영리 동네를 달리면 수확을 앞둔 벼들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새참을 먹는 농부, 그 집을 지키는 개, 그 집에 고지서를 배달하는 우체부가 들어간다

바람산 정상에 올라가 소리를 질러 보기도 하고 운동을 하다 가끔 지나가는 등산객과 인사를 나눈다

산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고 더 오르려다 그러다 가다가다 그만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의지와 포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의지는 그저 속으로만 가열차게 불태우고 포기의 불씨는 쉽게 꺼진다

저 산은 다음에 하지만 매번 그다음은 그다음으로만

내가 기껏 오를 수 있는 곳은 동산 만한 일영리 바람산 정상이다

그곳은 정상에 오르면 흔히 볼 수 있는 안내표시 하나 없다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잎 여섯 잎 일곱 잎 여덟 잎 아홉 잎 열 잎들은

가을바람에 깡그리 날려 온데간데없이 흩어지고

추운 겨울이 오면 동면에 들어간 곰처럼 이번 겨울은 그렇게 나고 싶다

그 어느 해 보다 치열하게 달려왔고 내게 주어진 시간 시간이 충만했고 찬란했으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는 조금 더 성장한 나 자신을 보았고 인생이 어디쯤 와 있는지도 보았다

거창하게 말해 니르바나와 같은 세계를 살짜기 아주 살짜기 맛본 신비한 경험이었다

행복으로 두들겨 맞기도 했고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사랑을  받기도 했으며 그 자극만큼이나 아프기도 했다

여하간

평생 자산으로 남을 책과 영화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생의 교과서이다

그 엄청난 교과서를 얻기 위해 혹독한 시간을 보낸 것은 분명하다

남들은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냐고 이구동성으로 외칠 때에 나는 여적 3개월이나 남은 올해가 지리지리 길게만 느껴진다

좀 더 빠른 속도로 달력 장이 휘리릭 넘어갔으면 좋겠다

그저 아름다운 기억들로 속히 마무리 짓고 싶다는 알량한 속셈이다

나보다 더 열심히 산 사람이 내 말을 들으면 코웃음 치며 웃겠지 허허허!!!

3월에는 전시회 4월에는 책 출간 6월에는 영화 "모어" 개봉으로 전국팔도를 돌며 홍보에 모객을 하고

7월에는 뉴욕에도 초청받아 다녀왔으니 평생 이토록 화려한 시간이 있었던가

마치 2022년은 나의 해가 아닌가 하고 착각 속에서 하염없이 허우적대다 보니 축제는 온데간데없이 허망하게 끝나 있었다

행복한 시간은 그저 찰나였다

멋도 모르고 난 그 행복이 영원할 줄로만 알았다

단잠에서 깨고 보니 현실은 아무것도 아니 남는 탕진!!!

공허, 허무 뼈가 시리고 살이 애리는 통증은 언제나 나의 것이다

복에 겨워 참 많이 웃고 참 많이 울었던 2022년이다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7시 이재후 아나운서가 하는

출발 FM과 함께 라디오에서 클래식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이재후 아나운서님께 문자라도 보내고 싶지만 차마 소심한 내가 보낼 수는 없는 일

이재후 아나운서가 내 사연을  읽어 준다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서 꺄아악!!! 하고 소리를!!!

9시에는 김미숙의 가정음악을 듣는 나는 클래식 FM 빠순이다

일기를 쓰고 청련사 절에 가서 오늘 공연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려야겠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절에 가는 걸 매우 좋아라 한다

오늘은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식에서 나의 사랑하는 친구 이랑과 함께 공연을 한다

랑이와는 2017년 보안여관에서 신의 놀이 낭독회를 가진 후 거의 5년 만에 제대로 갖는 공연인가

물론 웃어 유머에 뮤직비디오나 이런저런 행사를 간간히 같이 하기도 했지만

임진각은 얼마 전 DMZ 영화제 트레일러 촬영 때 한번 가 보고 두 번째 방문이 되겠다

드랙을 하고 캠프그리브스에서 1,2차 촬영을 하고 임진각 곤돌라를 타고 가서 파주 임진각 제2전망대까지

그곳은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산책한 길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운치 없는 곳을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찾아온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여하간 참 희한한 일을 많이 하고 사는 내가 신통하고 감사하다

그 어떤 드랙퀸이 드랙을 하고 민간인은 갈 수도 없는 곳에서 촬영을 하겠냐며!!!

이 일은 무조건 내가 최초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8월 땡볕에 타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무엇이든 앞서가려면 피를 철철 흘리는 게 미덕인 걸까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었다

여하튼 오늘 공연 곡은 이랑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와 임진강 두곡이다

축하 공연으로 강산에도 온다는데 얼마만의 랑데부인가

그 인간은 2004년 나한테서 요가를 배우면서 한때 가깝게 지냈었다

정말 오래전 일이구나

그 파릇파릇했던 젊음이 사무치게 그립다

오늘은 모지웅 작가가 동행하는데 지웅이는 인생에서 만난 귀인중에 가장 핵심 인물이다

이름마저도 모지민 X 모지웅 너무 운명이다!!!

지웅이와 나는 또 다른 전시회와 언젠가 나와야만 하는 사진집을 계획하고 있다

4년여간 날 쫓아다니며 찍은 사진만 해도 책 열 권을 될지 싶다

예술이 대체 뭐라고 지웅이와 나는 쓸데없이 성실하다

이 말저말 하염없이 쓰다 보니 어김없이 장에서 신호가 온다

변을 보고 오는데 모모의 밥 통이 비어져 있고 야행성인 모모는 이제야 자러 겨 들어갔다

마침 커피가 떨어져 믹스커피를 마시는데 어제 아침 9시 대학로 스타벅스에서 마셨던 아메리카노 한잔이 간절하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 공연 파이팅이다!!!


2022 0922


브런치에 저장된 작년 9월에 쓴 일기인데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브런치는 오래전에 가입을 했었고 최근에 작가 신청을 했다

브런치 작가가 됐다고 이메일을 받은 날로부터 하루도 빼먹지 않고 글을 올렸다

나는 대체로 묘시에 일어나 일기를 쓰기 때문에 등장하는 것들이 다소 일정하다

일테면 클래식 라디오, 고양이 모모, 쾌변 등등 ㅎ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아 아침형 인간인지라 이 시간에 머리가 가장 맑다

대부분이 밤에 일기를 쓴다면 나는 거꾸로 아침에 일기를 쓰는 사람

그 일기를 공개한다는 것이 남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일요일 내일은 한주의 시작인 월요일

시간은 부리나케 가기만 한다


2023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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