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가 되지 못한 것 같아 - 삼매경

무언가가 되기 위한 지옥에 대하여

by 모리

* 이 글은 연극 <삼매경>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34년의 메타픽션



연극 <삼매경>은 함세덕의 원작 <동승>을 연출가 이철희가 재창작한 작품이다. 34년 전 자신의 연기를 실패로 여기며 후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배우가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저승길에서 이탈한다. 삼도천에 뛰어든 주인공은 마침내 그토록 염원하던 1991년의 연습실에 당도하지만, 여전히 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없음에 절망한다. 결국 그는 은밀한 방에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극을 새롭게 써내려 가기로 한다. 그러나 인물들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공연을 관람하기에 앞서 참고할 만한 정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작품과 배우의 관계였다. <삼매경>은 고전의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니라 그 역사에 대한 호명이다. 1991년 박원근이 연출한 <동승>에서 주인공 도념 역을 맡았던 25세의 지춘성은 제15회 서울연극제 남우주연상과 제28회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인기상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영원한 동승’으로 불린다. 그로부터 34년이 흐른 지금, 59세의 지춘성이 다시 도념을 연기한다.


이 작품의 가지는 메타픽션적 성격은 원작 <동승>에 대한 것뿐 아니라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사유에서도 드러난다. 공연을 관람하면서 느낀 이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은 ‘사색적이다’였다. 대사 한 줄 한 줄에 무대의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 무겁고 절절한 포효를 통해 배우의 고뇌를 부르짖는가 하면, 연극을 둘러싼 실제 상황을 언급하는 가벼운 농담들에서도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다.



무대가 말하는 것



공연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배우들이 서 있는 무대를 보고 나는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해야만 했다. 언제부터 프롤로그가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찌감치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때는 영문을 몰랐으나 공연을 다 본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 달리 느껴지기도 한다. 관객들에게는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부터 공연의 시작이지만, 배우들은 그보다 한참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거듭했을 것이다. 어쩌면 난 그때 막이 오르기 전의 무대, 혹은 대기실의 풍경을 본 게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의 추상적 매력을 극대화하는 요소는 도념 역을 맡은 지춘성 배우를 제외한 다른 배우들의 열연이다. 화려한 배경 음악과 인위적인 효과음은 배우들의 발성과 움직임을 통해 탄생한 생생한 소리로 대체된다. 배경과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잿빛 옷을 입은 그들의 신체는 사계절의 흐름과 다양한 자연물을 형상화하는 살아있는 재료가 된다. 이 역시 배우라는 존재와 그 역할의 경계를 확장하는 시도처럼 느껴졌다.


동양 회화의 특징은 ‘여백의 미’이다. 음향은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소리를 통해 최소화되고, 소품들은 생략된 채 허공에서 관념적으로 등장한다. 극의 흐름에 따라 여러 장치가 활용되긴 하지만 무대 디자인 역시 물이 고인 웅덩이와 시멘트벽, 맨홀을 제외하면 단출한 편이다. 이처럼 절제된 구성과 더불어 어스름한 조명이 비추는 희뿌연 안개,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맑은 물방울 소리, 조그만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는 마치 한 폭의 고즈넉한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세월은 유수와도 같아



<삼매경>의 서사적 배경이 가진 매력은 시공간의 모호성에 있다. 이 작품은 과거의 작품에 대한 재창작이자 과거의 역할과 재회한 배우의 무대이며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물의 삶을 그린다는 점에서 결국 과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시공간이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여러 층위에서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 관념과 현실, 무대와 실제의 경계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며 진흙탕 속의 연꽃처럼 피어나는 철학적 질문은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한다.


작품의 초반부에서 어린 도념과 마주 앉은 도념이 말한다. “난 네가 되지 못한 것 같아.” 이 ‘같아’라는 불확실성이 자신을 괴롭힌다며 그는 곧 정정한다. “난 단 한 번도 네가 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완벽한 도념이 되기 위해 1991년의 연습실로 회귀한다. 그곳에서 재현되는 <동승> 속 장면은 과거이지만, 도념 역을 맡은 인물은 현재의 도념이다. 그가 연기를 펼치는 동시에 어린 도념이 반사된 거울 속 이미지처럼 함께 연기하며 그를 따라다닌다.


결국 완벽한 연기에 또다시 실패한 도념은 어린 도념을 어딘가로 불러들인다. 과거의 실패를 질책하는 그에게 어린 도념이 말한다. “기억은 왜곡되고 변형되는 곡선과 같아.” 연기가 실패했다는 것은 도념의 상상일 뿐이라며. 도념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로운 <동승>을 만들어 어린 도념을 덫에 빠뜨린다. 그러나 극 속의 인물들은 좀처럼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초부가 우스꽝스럽게 말을 더듬는가 하면, 새로 오픈한 가든이라 그런지 서비스가 좋다는 등 1939년작에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 소재가 담긴 대사들이 등장한다.


기억의 가변성에 대한 어린 도념의 대사와 도념의 관념 속에서 뒤틀리는 <동승>의 장면들은 늘 현재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속성과 그 한계에 대한 은유처럼 다가온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사물이나 장소를 오랜만에 다시 마주하고 생각보다 조그맣다고 느낀 적 있는가? 이는 우리가 그 대상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겹쳐 보기 때문이다. 과거는 결코 온전히 기억될 수 없다. 항상 현재의 관점에서 덧씌워질 뿐. 따라서 후회는 과거라는 환상 속에 스스로 파놓은 덫이며 과거와의 작별은 현재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지독한 삼매경



그렇다면 도념은 왜 자신의 덫에 빠진 것일까. 아주 간단한 대답이 작품 속에서 등장한다. “사랑하니까!” 삼매경은 ‘잡념을 떠나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를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연기를 향한 도념의 집념은 강박을 넘어 가히 마조히즘적이다. 연극을 잘 모르는 나지만, 대사뿐 아니라 그의 몸짓과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에서 연극에 대한 뼈저린 애증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한다는 건 그것의 전문가가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의 고통’은 배우라는 직업에도 어김없이 적용되나 보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괴로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보며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말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들의 고통을 동정할 것이다. 하지만 도념은 말한다. “다 타버리고 싶어, 이곳이 지옥이 된다 해도!” 극중 역할과의 완벽한 물아일체에 도달하고자 했던 도념. 배우의 세계란 결국 무언가가 되기 위한 지옥이다. 도념과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자신을 괴로움으로 몰아넣은 도념을 증오하는 그의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다. 그 절절한 외침 속에서 나는 대사의 내용을 이해하기도 전에 감정에 압도되어 눈물을 흘렸다.


그럼에도 그는 이 지독한 고통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연극을 하겠다는 도념의 선언은 그가 결코 어리석지도, 불쌍하지도 않음을 증명한다. 대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그에게 느꼈을 것이다. ‘존경’을. 무언가에 대한 사랑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아름다움과의 작별



하지만 도념은 결국 완벽한 연기를 단념한다. 연극에 대한 사랑 속에서 또 다른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토끼를 잡으려다 사람의 목을 여섯 개나 베어버린 도념에게 주지가 말한다. 살생은 가장 큰 죄악이거늘 어찌 그리 자신을 모질게 대하냐고. 도념이 죽인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나 자신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죽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라는 대사는 그의 고뇌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드러낸다.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대화 끝에 <동승>의 마지막 장면을 연기하는 도념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는 초부의 말처럼 그의 뿌리 깊은 슬픔이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도념의 어머니가 남긴 말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죽고 나서 결국 깨닫는 것. “삶은 슬퍼.” 그러나 삶과의 작별을 앞두고 미련을 버리듯 외투를 내려놓는 도념의 모습은 슬퍼 보이지만은 않는다. “스님,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동승>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게 대체된다.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


그렇게 무대 뒤로 사라지는 도념의 발걸음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한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미완성된 과제나 사건을 더 오래 기억하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도념이라는 역할에 대한 집착이 자신의 연기를 ‘미완성’이라고 스스로 규정한 결과임을 그는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것일까. 그러나 미완성 역시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음을 도념은 끝내 받아들인다.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를 택한 도념, 그러나 그 실패조차 아름답다고 말하는 도념의 마지막은 누구보다 뜨겁다.



지옥 찬가



이철희 연출가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나는 뜨거워 본 적이 있나’, ‘나는 나다워 본 적이 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으면 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나는 잘 모르겠다. 없는 것 같기도, 이미 그런 시절을 지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오늘도 밤늦게까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걸 보면 내 사랑의 지옥 불도 아직 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불태워도 도념의 열정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다.


<삼매경>에서 감탄했던 또 다른 점은 배우 지춘성의 엄청난 대사량이었다. 59세의 나이에 그 많은 대사를 유수처럼 쏟아내는 광경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성대에 대한 혹사처럼 느껴지는 격정적인 대사도 많았는데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연기를 이어 나가는 모습이 진심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인사를 위해 그가 걸어 나오는 순간,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수줍음이 억눌렀다. 물론 모든 배우가 훌륭했지만 이 무대만큼은 그가 주인공이기에.


오늘 밤, <삼매경>을 꽃피운 모든 지옥으로 보내는 팬레터처럼 나는 이 글을 쓴다.

지옥에 대한 가장 완벽한 예찬에 부치는 답가인 셈이다.




원문 :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6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