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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Apr 24. 2023

당신의 기억을 삽니다 (스토리발표)

2004년  창작 스토리 공모작  영화부문 장려

당신의 기억을 삽니다


 

  초췌한 얼굴의 소영.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하는 모습. 도대체 소영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눈물 그렁 맺힌 채 인터넷에 접속하는 소영. 아이디와 비밀 번호 천천히 누르면 1개의 메일이 와 있다. 제목 없는 수신된 메일을 열람하는데 소영은 놀라서 어쩔 줄 모른다. 메일의 내용은 이러했다.

 

기억을 삽니다.

당신의 기억을 삽니다. 죽도록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저에게 연락 주세요. 당신의 기억을 사겠습니다.

011-405-81**

 

소영은 메일에 적혀 있는 번호로 서둘러 전화를 거는데 가냘픈 음성의 여자가 받는다. 그녀의 이름은 오정인. 잊고 싶은 기억을 사겠다는 정인을 만나기 위해 소영은 3년 동안 부은 적금을 해약하러 은행에 간다. 그 기억만 없앨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돈쯤이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소영. 기억을 사겠다고 나선 오정인은 먼저 소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씀하신 천만 원이에요. 정말 내 기억을 사실 생각이에요?"

"물론입니다. 자 나에게 당신의 기억을 말해 주세요, 그 즉시 소영씨 기억은 내 것이 되는 겁니다. 그 대가로 제가 이 돈을 받는 거구요? 어때요?"

기억을 사겠다는 메일이 왔을 때부터 이상했다. 정말 천만 원을 주면 소영에게 있었던 나쁜 기억이 사라질 수 있을까.

"나에겐 당장 천만 원이 필요해요. 그러기 위해선 이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했어요. 소영씨 기억을 저에게 말해 주세요"

 

소영의 기억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소영은 집이 대전이라 학교에 다니기 위해 서울에서 자취를 해야 했고 밤에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새벽이 돼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따라 친구들과 술 한잔 씩 하고 오던 탓에 시간이 조금 늦어 있었다. 거의 집 앞까지 올 무렵, 소영 뒤에서 무언가 '팍' 하고 튀어 나왔고 깨어나 보니 아파트 옥상이었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보였고 그 사내의 입술 옆은 반쯤 찢겨져 있었다. 쌍꺼풀이 짙으면서도 매서운 눈을 가진 그의 얼굴이 정확히 기억이 났다. 사내는 소영에게 다가와 앞 단추를 뜯은 채 얼굴을 깊숙이 들이미는데...그만!

기억과 천만 원을 맞바꾼 두 여자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기억을 산 여자

 

천만 원을 받은 정인은 밀린 카드 대금을 먼저 해결하고 남은 돈으로 옷가지들을 샀다. 이것저것 옷걸이에 대보며 만족해하는데, 같은 시간 소영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오가며 예전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며칠 후.

아르바이트를 일찍이 끝내고 부리나케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탄 소영, 이어폰을 꽂으며 음악 감상에 한참 젖어 있을 무렵, 무언가 따가운 눈초리.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면서 소영은 올려다보는데. '왜 그러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소영을 응시하고 있다. 기분이 불쾌한 소영은 자신을 음흉하게 내려다보는 남자를 보고 '치안일 테지' 라고 가볍게 여기며 자리를 옮겼다. 자신을 전혀 몰라보는 소영을 보고 사내는 이상하게 여기는데. 아무렇지 않게 소영은 전철에서 내리고 사내는 뻥하니 표정이 밝은 소영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못 뗀다. 그러면서 사내는

" 쳇, 내가 그렇게 좋았나."

소영이 앉았던 자리에 앉는 사내, 그의 이름 조. 범. 석. 신문을 보는 척하며 앞에 서 있는 미니스커트의 여자 다리를 빤히 감상하고 있는데 저 만치 서 있는 누군가가 범석을 보고 부르르 떨고 있다. 그녀는 소영의 기억을 산 오정인. 입술 옆에 찢어진 흉터. 짙은 쌍꺼풀의 매서운 눈. 정인은 자신을 알아볼까 겁이 난다. 다음 정류장에서 막 내리려는데 힐끔힐끔 쳐다보는 정인의 시선을 느낀 범석은 그런 정인을 무섭게 노려보고. 전철 문 열리면 도망가듯 뛰어가는 정인을 보고 덩달아 달려가는 범석. 숨이 찰 만큼 뛰어가는 정인의 걸음을 따라잡을 찰나, 타닥 부딪치는 조형사와 범석.

"아이씨. 길 좀 잘 보고 다녀"

조형사의 걸쭉한 목소리 들리고 옷을 털며 일어나는 조형사를 무시하고 범석과 정인의 뒤 쫓기는 계속되는데.

신길 역에서 만나기로 한 조형사와 김민석. 돈 가방을 들고 있는 김민석이 먼저 일어나 인사를 한다. 조형사는 우선 돈 가방을 건네 받는데. 조씨가 형사라는 사실을 모른 채 민석은 자신의 기억을 팔겠다고 나서 왔고

"이천만 원입니다. 정말 내 기억을 사신다는 말씀이세요."

"이 돈이면 당장 우리 집사람 수술비는 치를 수 있을 겁니다. 민석씨 기억을 얘기해 보세요. 어떤 기억이죠?'

 

민석의 기억

 

3년 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말하자면 우발적이었다. 돈만 훔치고 나올 작정이었는데 박노인이 112로 신고 전화를 하려는 모습에 화가 나 순간 살인을 저질렀다. 죽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신고를 막으려고 주먹으로 살짝 친 것뿐이었는데. 노인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었다. 어떻게 할지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훔친 돈도 다 옆에 놓은 채 민석은 도망 나왔다. 이틀 후 집 앞에 찾아갔을 땐 형사들로 가득했고 여기저기 용의자를 수색하는 모습에 겁이 났다. 민석은 자수하려고도 했었지만 결혼 한지 1년 된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가 눈에 밟혔다. 지금까지 민석은 형사들에게 잡히진 않았지만 죽은 박노인이 꿈에 나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미칠 것 같은 민석은 기억을 팔기 위해서 전세금까지 빼 갖고 왔다.

 

기억을 산 남자

 

형사 생활을 십 년이 넘게 해 왔지만 그 십 년 동안 병든 아내를 수발하기까지 조형사는 힘에 부대꼈다. 어느 날 우연히 기억을 사고 팔 수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된 조형사는 아내의 병원비라도 어떻게 해결해 보고자 남의 기억을 사는 조건으로 돈을 받는 것이었다. 이천 만원 정도면 아내의 입원비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 십 년 동안 모아 봤자 아내 병 수발하는데 다 들어갔고 이천만 원까지 쌓인 병원비를 해결 못하면 당장 호흡기를 뺄 참이었다. 조형사 의 아내는 십 년 전 교통사고로 지금까지 식물인간으로 살고 있다.

민석의 기억을 산 조형사는 아내 병원비를 해결했음에도 가슴이 답답해 왔다. 밤마다 어떤 늙은 노인이 찾아와 조형사를 괴롭혔다. 가위가 눌려 그랬거니 하면서 밤잠을 설쳤지만 조형사는 이제는 밤이 무서워 억지로 잠을 자려 하지 않을 상황까지 왔다. 이대로라면 형사 생활을 오래 할 수 없겠다란 결론 아래 조형사는 사표를 낼까 내심 고민했다. 십년직장을 버리자니 아내가 걸리고 형사 생활을 계속 하자니 양심에 못 견딜 것 같아 괴로웠다.

어느 날 조형사는 3년 전 박노인의 집을 더듬더듬 찾아간다. 살인 사건 이후로 집값이 하락해서인지 동네 분위기가 여간 좋지 않았다. 기억 속의 집은 3년 전 고대로 였다. 낡은 대문을 여는 순간 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인의 등이 보이자 조형사는 얼른 몸을 숨겼다. 문틈으로 보이는 노인의 등이 왠지 낯익어 보였다. 그래, 저 노인은 나를 모를 것이야. 조형사는 살금살금 걸어 노인의 등에서 섰다.

"저 할머님"

" 뉘쇼"

늙은 노인이 뒤를 탁 돌아보는 순간, 조형사는 놀라 기겁을 했다. 늙어서 쭈글쭈글한 피부로 변하긴 했지만 어린 시절 헤어진 어머니였다. 분명했다.

조형사는 모든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섯 살 때 조형사를 입양 보내던 생모였고 기억 속에 죽은 노인, 밤마다 괴롭혔던 박노인이 조형사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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