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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Apr 24. 2023

댁의 남편을 믿으십니까 (스토리 발표)

2004년 스토리협회 발표했던 스토리

당시에 편당 십만원의 고료를 받고 게재

 



댁의 남편을 믿으십니까?

                                            2004. 스토리

 

보라아파트 103동 반상회.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것도 아쉬울 게다. 반상회만 있는 날이면 103동 안주인들이 떼 지어 모여드는데 이건 난민이 따로 없다. 횡단보도 건너 바로 보이는 새로 생긴 라임아파트만 해도 얘기를 들어보면, 맞벌이 부부가 많아서인지 반상회 모임은 한 달에 한 번도 힘들다고 그쪽 부녀회장이 침 튀겨 가며 흉을 본 적이 있다. 딱히 반상회라고 해서, 특별한 안건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맨 발로 슬리퍼 짝 끌고 와서는 부스스한 얼굴을 들이밀며 엉덩짝을 바짝 붙이는 이도 있다. 반상회 때 이루어지는 회의라고 해 봤자 쓰레기 분리수거, 관리비 사용 내역, 1년에 두 번 있는 복지관 봉사 얘기 10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50분이 여느 아줌마들이 떠는 수다의 시간이다. 누구 남편은 승진을 했네, 한 번도 참석 않는 잘난 여편네 낯짝이 궁금하다는 가십 거리가 주를 이룬다. 그럴 때마다 점잖은 204호 조용숙 여사는 대충 회의가 마무리되면 소리 없이 발꿈치를 들고 달아나 버린다. 이때, 조여사의 뒷모습이 사라지기도 전에 머리를 모으고 이빨을 부딪치는 여자가 있으니, 그녀의 이름하여 신달자 (45).

달자 남편 심상두(45) 의 직업은 이비인후과의사다. 103동에서 그나마 잘 사는 집이라고 꼽힐 수 있는데, 대부분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이곳 103동이라서 심상두 의사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베란다에서 슬쩍 엿보는 이도 있다. '사' 자 붙은 남편과 살붙이고 사는 여자는 팔자 한 번 폈다는 이유만으로 부러움과 동시에 시기 거리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것은 돈 잘 버는 의사 남편을 뒀다는 이유 한가지뿐이다. 이빈후과의사 남편을 두어서 그런지 달자는 신통한 귀를 갖고 있다. 103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정보통 아줌마로 통한다. 그로 인해 301호 달자 집은 손님이 끊일 날이 없고.

"여기 2호 딸내미는 유부남한테 흠뻑 죽었다지? 남자 집을 풍비박산 내고 난리가 났드랴 그 뭣이냐 그 집 아마 이혼했을걸?"

302호 신숙영(25) 얘기다. 숙영은 얼굴도 곱상하고 수더분해서 남자가 따르겠거니, 여자들이 모일 때마다 소곤댄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소곤거림이 기정사실화가 된 듯 유독 나이 많은 유부남이 줄 곧 따랐다. 한 미모에 반해 집 앞까지 찾아와 부인과 사별해서 외롭다며 만나 달라고 떼를 쓰는 이도 있고 버젓이 선물 공세로 데이트 신청을 하며 아침부터 방금 세차한 고급 승용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숙영은 '빨간 여우' 라는 별명이 붙었고 여우 꼬리 좀 구경 하자며 실룩대는 엉덩이를 달자는 흉내 내곤 했다. 이때 숙영모 (여금실,50)는 주변에서 들리는 자기 딸의 스캔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숙영이 받아 오는 값 비싼 선물을 모아 다가 주변에 되팔곤 했다. 몇 번이고 자기 남편이랑 떼어 달라며 사정사정을 하는데도 자기 딸이 예뻐서 그런 것을 어떡하느냐며 큰소리를 뻥뻥 치는 여금실. 누가 봐도 쉰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피부가 탱탱하여 이 동네에선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중에 하나다.

가만있을 달자가 아니다. 집집마다 남편 단속하라며 '빨간 여우 피하기 작전' 을 세우는가 하면 302호 주변은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런 데는 속사정이 있었다. 302호 숙영은 여금실의 딸이 아니다. 그러면 말이 될 법도 한데,

숙영부가 암으로 세상을 뜨고 나서 남은 의붓딸을 십 년 동안 키워 온 것이었다. 딱히 수입 없이 살고 있는 두 모녀는 재력 있는 남자 하나를 꼬드겨 큰돈을 거머쥐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다. 동네에서 들리는 소문을 귀를 막지 않고선 모를 수가 없는데 이 또한 연기였던 것인지 302호 숙영모는 반상회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그런 달자는 인기 많은 의사 남편을 두고 있기에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다행인 게 돈 잘 버는 남편이지만, 인물은 영락없이 '떨어지다 만 메주' 로 비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 때 옆에서 104호 여자 도여사 (도순자, 40) 가 한마디 한다.

" 언니, 돼지를 인물보고 잡아먹나."

며칠 전부터 심상두의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그럴 때마다 달자는 문을 배꼼 열고는 302호 집에 숙영이 들어왔나 먼저 살폈다. 숙영이야 말로 동네에서 '빨간 여우' 로 통하기도 하지만 어른이 말을 하면 대꾸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별명이 '노대꾸' 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아파트 주변에 개 한 마리라도 있을라치면 "어이 노대꾸, 대꾸놈 이라와봐" 라며 삼삼오오 모여 놀려 댔다. 뒤도 안 돌아보고 매몰차게 또각또각 구두 소리만 흘려 놓고 사라지면 달자는 고소하다고 자지러지며 배꼽을 쥐어 잡는다.

어느 날 달자의 딸 영란(20) 이 울며불며 들어와서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상두가 옆집 여자랑 밥을 먹는 것을 보았다는 것. 사실 진작부터 짐작했던 일이었다. 빨간 여우, 노대꾸가 사고한 번 칠 거라고 아니, 103동 어느 집 남편 하나는 걸려들 것이라고 긴급조치 사항으로 나왔던 얘기였다. 그럴 때일수록 침착한 신달자. 달자는 동네 여자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데 남편 관리 철저히 하라고 깃발을 먼저 든, 달자 자신이 누구에게 하소연하기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창피하다. 결국 달자는 대책을 세우는데.

떨리는 손으로 302호 초인종을 누르는 달자. 숙영모 금실이 삐쭉 얼굴을 내미는데 화장 냄새가 지독해서 코를 얼른 뺀다.

'그 에미의 그 딸이구먼'

"부침이 몇 장 붙었는 디 한 번 드셔 보라고"

어색한 웃음, 어색한 손 눌림 금실은 고맙다며 문을 닫으려는데 달자는 기회다 싶어 집구경좀 하겠다고 한다. 싫은 기색이 역력하여 나중에 보자고 눈웃음을 살짝 날리는데 달자는 힘껏 현관문을 열었다. 방안은 텔레비전 한 대 켜 있고 아무런 가구도 없이 시베리아 벌판 보단 조금 더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싸늘한 고요함. 360도 회전을 해도 다 들어오지 않을, 집안 곳곳을 살피는데 빨간 여우의 상징인 화려하고 야실야실한 옷들이 건조대에 널려 있었다. 그 옷의 촉감을 느끼는데 어디서 많이 맡아 본 향기, 그것은 상두의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데,

<한국이비인후과 협회 아로마 향> 이라는 박스가 달자 발밑에 깔려 있는 게 아닌가. 달자는 집어 들고 반쯤 찌그러진 곽대기를 보는데 조금 더 악물면 혀를 깨물 참이었다. 이게 뭐냐고 당장 묻고 싶었지만, 아니 노대꾸 어디 있느냐고 불러 세울 모양이었지만 동네 시끄러워지는 게 내키지 않았다. 달자는 침묵으로 옹곳이 서 있는 금실을 냉랭하게 바라보는데 열쇠를 따고 들어오는 빨간 여우, 노대꾸의 짙은 향수 냄새가 방안까지 나는 듯 했다. 현관문에서 맞는 달자와 숙영. 그리고 그 뒤에 튀어나오는 상두의 기침 소리. 달자는 숙영을 밀치고, 현관문을 막 열으려 시도하는 상두의 팔을 잡아 뺀다.

" 다 집어치우고 들어와 "

진위 여부가 가려진 상황에서 달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렇게 착한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아마도 내일은 동네에 소문을 내 볼 참이다.

" 그럼 진즉에 말을 했어야 오해를 안 할 거 아녀 이 양반아 "

이유인즉, 상두는 옆 집 숙영이 반 청각 장애를 입었다고 말을 한다. 아직 까진 말을 할 수는 있으나 귀가 들리지 않아 무료 병원을 소개해 줬다는 것. 그것이 고마워서 숙영은 저녁 대접을 했고 그 장면을 불륜의 현장처럼 목격이 되어 예민한 영란의 귀 까지 들린 것이었다. 반 청각 장애를 갖은 것도 모른 채, 숙영이 대꾸를 안 한다 해서 '노대꾸' 라 하고 절망을 당당함으로 바꾼 것을 새침한 '빨간 여우' 라고 했으니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다. 손수건으로 반쯤 벗겨진 이마를 닦아 가며 힘겹게 말을 하는데 의사 남편이 착하기까지 하여 달자는 일확천금을 얻은 것 같다. 아마도 내일은 상두의 선행이 103동 전체에 소문이 날거라 예상되는데,

아침, 문을 열자마자 104호 도여사가 달려와서는

" 언니, 어떻게 된 거야, 이 집 아저씨 야반도주 했어?"

" 새벽 학회 때문에 일찍 나갔는디 무슨 놈의 야반도주 너 뭐 잘못 쳐먹었다냐."

순간, 싸늘히 302호를 바라보는 달자. 옆집을 쿵쾅쿵쾅 두들기고 발로 차 보아도 대꾸가 없었다.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문은 열리고, 이게 무슨 벼락이던가. 어제 덩그러니 있던 텔레비전과 건조대마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혼이 나간 달자는 자신의 안방으로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오는데 장롱을 열어 보니 옷가지들은 이빨 빠진 것 마냥 사이사이 비어 있었다. 잠든 사이에 옷짐을 챙기고 나간 것이었다. "안 돼" 머리를 부여잡으며 외치는데서 달자의 모습.

" 세상에, 언니 불쌍시러 어떡하다냐, 그 기집에 대꾸년인지 빨간 여우새낀지 지 계모하고 바람나는데 지가 왜 따라갔데? 알고 보니 귀머거리였다며? 계모 년이 돈벌이로 써 먹었단 말이 알고본께 사실이었구먼. 아휴, 눈에 두 가시가 없어서 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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