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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Apr 24. 2023

손님 (수상록) 소설부문

동서문학상 소설부문  2014년 가작 수상

아이가 울음을 그쳤다. 사탕 하나에 줄줄 흘렀던 눈물이 쏙 들어가는 걸 보니 아이는 아이다. 여자는 입안에 든 사탕을 오물거리며 손에 쥔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를 잠깐 살피는가 싶더니 거실로 나갔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른 채, 여자는 거실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무얼 찾는 것 같았다.


 여자가 찾으려는 것은 리모컨이었다. 여자는 소파 밑에서 찾아든 리모컨을 줍자마자 텔레비전을 켰다. 오른쪽 화면 하단에 '뉴스 전문채널' 이란 기울임 글씨체가 보였다. 여자는 뉴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잡아 뜯으며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마냥 여자의 얼굴색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또박또박 무게를 가득 실어 뉴스를 전하는 앵커가 여자를 더욱 긴장하게 하는 듯했다. 서울고법 형사3부 재판장 박영철 부장판사는 19일 동거남과 전처 사이에 난 자식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 5일 보건복지부에서는 건강보험 혜택을 확대하고자. 아닌 듯하다. 여자는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아이가 있는 안방으로 갔다. 여자는 잠든 아이의 볼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아이의 깊은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가여운 것' 여자는 아이가 걷어차 낸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는 외출을 서둘렀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탓에 현관 거울에 비치는 여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까칠해 보였다. 여자는 감지 않은 머리를 대충 매만진 후에 가방 뒷주머니에 들어 있는 립스틱을 꺼내어 발랐다. 혹시라도 아이가 깰까 봐 여자는 조심스레 까치발을 들고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여자는 잠근 문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터널 같은 긴 복도를 빠져나온 여자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길고 긴 터널이었다. 여전히 어두운 터널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버튼을 누를 힘조차 없이 처진 몸으로 여자는 엘리베이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디가나 봐. 위 층 소희 씨다. 반갑지 않았지만, 여자는 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기 근데? 여자는 자신에게 물어오는 소희 씨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여자는 진작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갔을 걸 하고 후회하는 듯했다. 아이가 울던데? 여자는 짐짓 놀란 얼굴로 소희 씨를 바라봤다. 네에? ...저기... 여자는 어떤 대답을 할지 난감하다. 눈치 없는 소희 씨가 다시 물었다. 저기 뭐? 조카가 왔거든요. 그래서...아이 옷이 없어서...그래서.... 외...외출하...던 중이었어요. 그냥 넘어갈 소희 씨가 아니다. 근데 아이는? 아...저기... 지금 막...잠들어서...그래서...빨리 갔다 오려고. 여자는 혹시나 말을 자꾸 더듬는 게 잘못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됐지만,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가볍게 소희 씨에게 인살 하고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6개월 전, 은석과 이혼을 한 선영은 법원을 나오면서도 왜 이혼하는지를 몰랐다. 여느 남편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가정에 충실하면서 자상한 남편이었다. 깨가 쏟아질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남들 보기에 참 괜찮은 부부였다. 외도했다거나, 술에 빠져 산다거나 도박을 한다거나 그조차도 하지 않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범적인 남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은석이 갑자기 할 얘기가 있다며 선영을 밖으로 불러냈다. 은석이 선영을 밖으로 불러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서 선영은 보통 날처럼 화장을 고치고, 평소 아끼는 정장으로 차려입었다. 선영은 은석과 자주 가던 사거리 맞은편에 있는 호프집이 아닌 그 옆 신호등 앞에 서 있으란 말을 했을 때, 새로운 데이트 장소에 갈 거라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십여 분 지났을까. 선영은 신호등 앞에 서서 다소 긴장된 얼굴로 은석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되자 선영은 건널목으로 건너오는, 혼이 나간 듯한 은석의 거죽을 보았다. 무슨 일일까. 선영 가슴에 낯선 불안이 찾아들었다.


 은석이 선영을 데리고 간 곳은 가로수 옆으로 길게 늘어선 포장마차 길에 3번 집 '장미포차' 란 곳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장 말고 편한 차림으로 올걸. 진작 말하지 그랬느냐며 선영이 은석에게 투정을 부릴 때였다. 은석은 아무 말 없이 소주 석 잔을 연거푸 들이키더니 격양된 음성으로 대뜸 '우리 이혼 하자' 라고 했다. 선영은 은석의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그래' 라고 대답했다. 사실 이혼 하자란 말에 '그래' 라고 말한 자체가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물음도 없이 왜 이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그래' 라고 한 것은 잔뜩 달아오른 남편의 충혈된 눈빛에서 단단한 결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얼마예요?


 


 여자는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점퍼를 들어 주인에게 보였다. 삼만 구천 원이요. 아이에게 입힐 옷이다. 겉으론 여유 있는 척 웃고 있었지만 사실 여자는 아이 옷을 고르면서도 낯빛은 무언가에 쫓기는 것 마냥 불안해 보였다. 이거 사시게? 아줌마! 아줌마! 주인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자는 말할 힘조차 없었다. 집어든 옷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아줌마!!! 그제야 여자는 짧게 대답했다. 이걸로 주세요.


 


 사내 몇 명과 삼십 대 중반쯤 돼 보이는 여러 아주머니들의 전단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여자는 아주머니들이 내민 전단을 얼른 받아 빠른 속도로 훑었다. 모두 음식점 광고물이었다. 여자는 이쯤이면 아이를 애타게 찾을 법도 한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에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평소에 관심 없던 전봇대에 시선을 두며 여자는 혹시나 아이를 찾는 전단이 한 장이라도 붙어 있지 않을까 해서 한 글자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여자는 아랫동네까지 내려가 모든 전봇대를 꼼꼼히 살폈다. 전봇대에 부착된 전단은 대부분 집을 내놓은 광고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소희 씨를 또 만날까 내심 걱정이 된 여자는 비상구 계단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여자는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기라도 하는 듯 주변을 먼저 살폈다. 급한 마음이라 그런지 열쇠는 핸드백에서 나오질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겨우 찾은 열쇠를 확인하고서야 여자는 안심한 듯 숨을 내 쉬었다.


  아이는 아직까지 잠을 자고 있었다. 외출한 지 두 시간이 넘은 시간이었다. 여자는 사온 옷가지를 자는 아이에게 살짝 대 보았다. 분홍색 점퍼, 실제로 입히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잠든 아이의 얼굴. 참으로 평화로웠다. 여자는 슬쩍 아이 옆에 누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로 아이를 살며시 감았다. 아이의 심장이 뛰는 소리, 콧등으로 나오는 옅은 숨소리, 매끈한 피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세계에 온 기분이었다. 여자의 얼굴빛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가슴 한구석이 짠해지면서 금세 불안으로 바뀌었다. 여자의 마음에서 반복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 이. 가. 아. 니. 다.


 


 아이를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여자는 그저 며칠만, 단 며칠만이라도 아이와 같이 있고 싶었다. 아이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왜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찾지 않는 것일까. 여자는 아이를 아무 말 없이 데려오긴 했어도 '유괴' 란 무거운 단어를 씌우고 싶진 않았다. 돈을 요구할 생각도, 그렇다고 평생 데리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며칠만 아이와 함께 있다가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난 지금 아이를 찾는 소식이 없어서 여자는 도통 보내려야 보낼 수가 없다.


 아이를 처음 본 것은 사흘 전 서울역 앞이었다.


 


 몇 살이니? 여섯 살. 아이는 어린애답지 않게 몹시 차가운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이름이 뭐야? 아영. 김아영.


 선영은 길게 늘어트린 아이의 머릿결을 한번 만져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윤기나는 머리칼이 꼭 스무 살 처녀처럼 보였다. 갓 구워낸 빵처럼 부푼 아이의 양볼. 선영은 아이에게서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왜 혼자 있어? 선영은 최대한 무릎을 굽히고 아이의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엄마 과자 사러 갔어. 또박또박 존댓말을 하는 다른 아이들보다 버릇없는 듯 반말을 해대는 모습이 선영에겐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선영은 핸드백에 든 초콜릿을 꺼내어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잘도 받아먹었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선영은 갑자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와 선영 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아줌마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엄마 친구야. 아이는 선영의 손을 잡았다. 떨렸다. 선영은 아이의 걸음을 무시한 채 빠른 속도로 역 광장을 빠져나갔다. 아이가 숨을 헉헉댔다. 그리고는 더욱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줌마?


 


 아줌마!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여자를 찾는다. 똘망똘망 여자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 그 영롱한 눈빛은 마치 출산 후 처음 대면하는 엄마와 아이의 눈빛이 아니었을까. 지금 들고 있는 이 묘한 느낌이 정확한지는 여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서러움에 여자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나 아줌마랑 사는 거야?


 같이 살고 싶었다. 아이는 좀 더 나아가 조금 있으면 '엄마' 라고 불러줄 것만 같다. 근데 우리 엄마 왜 안 와? 친구라며!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는 아이가 찾는 '엄마' 란 말에 가슴이 막혔다.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그건...


 여자는 괜히 옆에 놓은 분홍색 점퍼를 아이에게 보여준다. 아줌마가 사온 거야. 예쁘지? 이거 입어보자. 끄덕이는 아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마를 찾은 아이였다. 언제 그랬냐 듯 이젠 울지도 않고 여자를 따르려는 눈치다. 아이에게 옷을 입히면서도 여자의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데 왜 자꾸만 울어? 아줌만?


 


 음습한 숲 속을 파헤치는 사냥꾼처럼 박 원장은 선영의 입구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태 전, 산부인과 진료를 받은 경험은 있었지만, 그때는 여의사에게 진료를 맡겼었다. 아마 생리 불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산부인과를 찾은 적은 없었다. 한 달 전, 냉증으로 인해서 고심 끝에 찾은 병원이었다. 옆집 말로는, 산부인과 진료는 역시 남자가 잘 본다며 꼭 한 번 가보라고 채근하는 탓에 오긴 했지만 정말 잘 보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결혼한 여자가, 그것도 오십 줄은 됐을 남자 의사에게 은밀한 장소를 보인다는 자체는 여간 민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생각이 들고 조금 지나서 '의사' 와 '남자' 는 완전히 다르다고 여기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선영은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뭘 그리 오래 들여다보는지 박 원장은 한참이나 선영의 입구 앞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항생제 넣겠습니다. 힘을 느슨하게 풀어주세요.


 


 그제야 선영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며칠 전 본 신문기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가 환자를 마취시키고 폭행을 일삼았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보고 선영은, 박 원장 역시 착용한 마스크 사이로 어쩌면 선영의 입구 속에 들어오고 싶은 욕구를 애써 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환자의 입장으로서 쟤 몸을 지키고 싶었던 본능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나면 동물도 인간에게 순해지듯 선영 역시 '다 됐습니다.' 라는 박 원장의 말에 사냥꾼 손에서 탈출한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그도 잠시, 박 원장은 선영에게 초음파 검사를 권했다. 초음파 검사를 마치고 범상치 않은 박 원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선영 역시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관계는 보통 자주 하는 편인가요?


 이태 전에도 그랬었다. 단순한 정기 검진이었던 그때도 의사가 선영에게 부부관계를 보통 몇 번이나 하느냐며 심문하는 듯 묻는데 그 당시는 결혼한 지 겨우 몇 달 되지 않은 신혼이라서 선영은 대답하기 곤란하다고 넘겼었다. 의사는 씩 한 번 웃더니 증상을 아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니 꼭 대답해야 한다고 해서 '한 달에 세 번' 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박 원장이 어떻게 해서든 선영의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눈치를 보냈다. 글쎄요. 지난달에 한두 번 한 것 같네요. 왜 문제 있어요? 냉증환자는 무척 많아요. 여자들은 찬 곳에 앉지도 말라잖아요. 환자분 같은 경우의 냉증은 경미한 증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박 원장은 뭔가 쉽게 꺼내지 못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뜸을 들였다. 결혼한 지 몇 년 됐나요? 2년 조금 넘었어요. 아이는? 아이는 없어요. 없는 거예요? 아님 안 갖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선영은 아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 초기엔 부모가 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싶어서 서로 합의로 피임을 했었고 양가에서나 지인들이 아이에 대해 물어올 때면 자연스럽게 임신하게 되었을 때 낳을 거라고 안심을 시켰었다. 결혼한 지 2년이 되었을 때 선영은 피임약을 먹지 않게 되었다. 이 정도면 아이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피임하지 않겠다며 임신 준비 선언을 했던 것도 선영 쪽이었다. 오히려 은석은 예쁜 아이들을 보면 지나치지 않는 선영을 아이에게서 떼어 내어 끌고 가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저 천천히 갖자는 말만 반복할 뿐, 가족계획에 관한 언급조차 없었다. 다만 '당분간 신혼을 즐기면서 살자' 고는 했었다. 그랬던 은석이 선영의 피임 중단 선언이 있던 그날 저녁, 엽산 제를 사 들고 왔다. 엽산 제는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먹는 거라는 말과 함께. 김선영 씨 나이가 서른이네요. 김선영 씨? 네에. 수술합시다. 수술이라뇨?


 


 우리 엄마가 나 버렸지? 과자 사 온다고 하더니 안 왔잖아. 지난번에도 우리엄마가 나 버렸다가 찾은 적 있었는데. 여자는 여섯 살 아이에게서 원망의 눈빛을 보았다. 그 빛은 무척이나 단호했고 차가웠다. 언제? 응? 언제? 아이는 한풀 꺾인 그 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지난번에도 나 버렸는데 ...응...그랬는데 ...경찰 아저씨가 찾아줬어.


 아이는 이미 큰 상처로 아파하고 있었다. 버림받은 아이. 여자는 아이가 버려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서울역에서 동상처럼 서 있는 아이를 보았을 때도 아이 주변엔 어른은 없었다.


 


 그날은 부산 바다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다시 한번 시작해보겠다고 결심을 하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오히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불안만 안겨줬던 여행이었다. 그때 아이를 본 것이었다. 아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영은 아이를 관찰했다. 선영이 그 자리에 서 있던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도 아이는 그 자리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다. 순간, 저런 아이와 며칠만이라도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은석이 원하던 아이. 너와 나의 아이. 우리 아이 아니 우리를 갈라놓게 한 아이. 아이를 본 그날, 선영은 불현듯 은석이 이혼하자고 한 이유가 혹시 아이 때문이 아니었을 까란 생각을 했다.


 


 선영은 수술한 지 3년이 돼서야 은석에게 얘기할 수 있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불임  선고를 받긴 했어도 지금처럼 자신을 사랑해주는 은석만 곁에 있다면 아픔쯤이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었다. 굳이 은석에게까지 알릴 필요가 없다고 혼자서 내린 결론이었다. 선영은 자신이 혼자서 결론을 내린 것처럼 은석 또한 아이에 대한 애틋한 소망을 혼자서 쓸쓸하게 품고 있었단 사실을 알고 괴로워했다. 은석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혼한 지 5년 되던 결혼기념일. 은석은 아이를 갖고 싶다며 선영을 설득했다. 은석은 아무래도 둘 중 하나가 문제 있는 것 같다며 불임 치료를 받아보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서른셋. 아마 은석은 선영의 나이와 자신의 나이를 가늠하면서 이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씨를 뿌려야겠다는 종족 번식의 욕구를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하는 은석의 꼼꼼한 성격에 선영은 가끔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언제나 선영 편에서 생각하는 남자였기에 이번에도 선영을 이해해줄 거란 기대감에 끄집어낸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나아, 3년 전 수술했어. 혹이 있었어. 처음엔 나도 몰랐어. 그때 당신이 그랬잖아. 속옷이 늘 젖어 있는 걸 보고 아래에 이상 있는 거 아니냐구 당신 그랬었지. 기억나? 응. 그래서 병원 가 봤는데 의사가 수술 안 하면 안 된대. 종양이 있는데 그때 악성은 아니라고 했어. 더 놔두면 악성이 돼서 위험하다네. 자궁을 들어내야 한대. 보호자랑 상의하라고 의사가 기회를 줬는데 미안해. 그때는 당신 걱정할까 봐 얘기 안 했어. 아니 못했어. 당신이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지 몰랐어. 알았다면 그때 얘기했었을 텐데.


 적요로운 분위기가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선영 쪽이었다. 적막했다. 선영은 지금의 이 적막감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털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은석은 선영에게서 또 다른 비밀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선영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니 은석은 선영이 말을 다 끝낼 때까지 중간에 자르지도 않은 채 듣고 있었다. 적어도 수술을 했다고, 아니 혹이 있었다고 얘기할 때, 그것도 아니면 자궁을 들어냈다는 엄청난 사실을 얘기했을 때도 놀라는 시늉을,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아니,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지 몰랐어. 알았다면 그때 얘기했었을 텐데라는' 말쯤에서 눈동자가 커진 것밖에는. 선영은 3년 만에 꺼낸 얘기가 지금에서야 엄청난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있어?


 


 소희 씨다. 여자는 덜컥 겁이 났다. 문 좀 열어 줘. 아이는 만화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별일 아니겠지' 라고 생각한 여자는 소희 씨 기척에 현관문을 살짝 열었다. 뭐해? 소희 씨는 여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문을 밀고 들어왔다. 소희 씨의 등장으로 아이는 멀뚱히 서서 소희 씨를 한 번 바라보는 것 같더니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집애 저 눈 좀 봐. 꼭 눈깔사탕만 하네. 헤헤. 한 손에 무언가 들고 있는 소희 씨가 아이를 보고 깔깔 웃었다. 조카라고 했나? 여자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희 씨를 만났을 때 조카라고 말을 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이종이야? 고종인가? 고종은 당연히 아닐 테구. 형제가 혼자라고 하지 않았나? 여자는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소희 씨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눈치다. 저기 근데 무슨 일로. 음. 우리 애들이 부침개 먹고 싶다 해서 붙였거든. 애 있다고 해서 갖고 왔지. 자기도 먹어보고. 고마워요. 소희 씨, 헤헤. 고맙긴 아 참! 소희 씨가 손뼉을 치는 바람에 여자가 다소 놀란 것 같다. 헤헤. 뭘 그리 놀래? 아까 자기 잠깐 나간다고 했을 때 말야. 어떤 모르는 여자가 자기 집 주변을 서성거려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막 저 길로 도망가던데 혹시 누구 오기로 했었어? 아...니요...어떻게 생겼는데요? 음. 대충 봤는데 여자 얼굴은 어려 보였어. 창문을 막 두드리기에 거기 사람 없다고 하니깐 대꾸도 안 코 줄행랑이 치더라구. 헤헤. 만화 보느라 정신없네. 애가 눈이 큰 게 아주 예쁘다. 계집애들은 애나 어른이나 예뻐야 한다니깐. 나처럼. 헤헤.


 소희 씨의 관심은 온통 아이에게 가 있다. 어색한 웃음을 짓는 여자의 표정을 읽었는지 막 나가려는 듯했다. 난 갈게. 잘 먹을게요. 응. 근데 자기 얼굴 너무 안 좋다. 그럼 쉬어. 여자는 또 한 번 표정이 바뀐다. 조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여자는 소희 씨 말이 자꾸 거슬렸다. 어떤 여자!


 


 은석에게 받은 위자료 몫으로 선영은 은석과 살던 집을 맡게 되었다. 이혼을 요구한 은석 쪽에서 위자료를 주는 것이 선영에 대한 당연한 배려라고 은석은 생각했다. 언제나 외로움은 떠난 자보다 남겨진 자의 몫이었다. 은석이 본가로 들어가 살면서 선영과 살 때보다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린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얘기해주던 사람은 다름 아닌 소희 씨였다. 선영의 시어머니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이유로 소희 씨가 가끔씩 은석의 안부를 전해줄 때면 선영은 듣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것을 전하는 소희 씨는 그게 자신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선영은 한 번도 소희 씨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소희 씨가 없었더라면 은석의 안부가 먼저 궁금해서 그의 자리를 맴돌았을지도 모른다.


 


 5년이란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고들 하지만 선영에게 있어서는 짧지도 않은 세월이었다. 이혼하고 잘 먹지 않던 술을 마셨고 가끔은 담배도 피웠다. 선영에게는 그리움을 뱉어낼 무언가 몹시도 필요했었으니깐. 선영은 언젠간 그가 떠나간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올 거라는 기대도 가끔은 했다. 열렬하게 사랑하여 결혼한 게 아니었을지라도 캠퍼스의 연인으로 서로에게 호감이 생겨 연애했고 결혼한 부부인만큼 사랑보다 더 애틋한 우정도 의리처럼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이제야 생각하니 ‘이혼하자’라는 말에 ‘그래’라고 대답한 것이 어쩌면 더 헤어질 만한 ‘거리’를 제공했던 것일까. 지금에 와서 후회해봤자 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어떻게 보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는지 배신감이 들어올 때는 선영은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미련 두지 말자. 그리워하지도 말자. 아줌마!


 아이가 여자를 찾았다. 응? 근데 아줌마는 엄마 없어? 아빠 없어? 응. 아줌마는 아무도 없어. 근데 아영아. 응? 왜? 아영이는 엄마 안 보고 싶어? 에이씨! 엄마가 나 버렸다니깐!!!


 여자는 아이를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체념한 아이의 표정, 차가운 아이의 말투에서 여자는 아이의 무뎌진 슬픔을 보았다. 무디어진다는 것은 그 상처에 익숙해졌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무관심과 같았다.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이의 상처였다. 여자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 너도. 그리고 나도 버림받았지. 우린 버려진 사람들.


 


 선영은 은석과 살면서 한 번도 부부싸움이라곤 해 본 적이 없었다. 위 층 소희 씨 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날 때면 '저게 바로 그 부부싸움이구나' 정도로 생각했지 부부싸움의 정의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


 어쩌면 둘 다 외동으로 자라온 탓에 외로움이 뭔지 누구보다 더 잘 알았기에 은석과 선영은 더 애틋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를 더 절실히 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두 번쯤은 해 보았지만 아이 때문에 이혼할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는데 아이 때문에 버려진 거라고 확신한 순간, 선영은 온 우주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모든 아이가 미울 줄만 알았었는데 가지지 못하는 것은 더욱 갖고 싶게 만드는 욕망이 선영을 계속 좇았다.  


 그러나 선영은 처음부터 없었던 건 결핍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이혼서류를 접수해 놓고 법정에 가기 하루 전날. 은석과 선영은 마지막 관계를 가졌다. 어스름한 불빛이 들어오는 베란다 테이블에서 선영이 석 잔째 와인을 마시고 있을 때, 은석은 선영의 옆에 앉아 잔을 내밀었다. 최후의 만찬인가? 은석은 슬며시 웃었다. 선영도 웃었다. 좋은 사람 만나.


 와인 한 잔을 비우고 난 뒤 은석의 한마디였다. 서른셋의 나이. 다시 시작하기엔, 아니 다시 사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닐까. 쓰게 말하는 선영에게 은석은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표정으로 했다.


 


 포장마차에서 이혼하자고 하던, 그때 본 은석의 눈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은석을 잡고 싶단 생각에 조금 흔들렸었다. 선영은 '아직 젊은데 뭘' 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하는 은석에게서 진정한 이혼사유를 묻고 싶었다. 머리 맞대고 서류를 꾸릴 때도 은석은 ‘이혼사유’를 묻는 란에서 머뭇거렸다. 항목에는 여러 가지 이혼사유들이 나열돼 있었다. 첫 번째 항목. 배우자 부정? 아니다. 정신적, 육체적 학대? 그것도 아니다. 가족 간 불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경제문제? 은석의 월급이라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성격차이! 흔히들 모든 부부의 이혼사유 중 하나가 성격차이라고 했다. 은석과 선영은 오히려 성격이 맞는 부부였다. 가끔 은석과 선영의 똑같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무료하고 건조하단 생각은 간혹 했었지만, 집이 아닌 밖에서 만날 때면 서로의 얘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친구 같은 부부라며 소희 씨가 부럽다고 어느 날인가 와서 얘기한 적은 있었다. 이혼 사유란에는 나머지 항목 두 개가 은석과 선영을 심문하고 있었다. '건강문제' 와 '기타' 만약 건강문제만 남아 있었더라면 해당하는 이혼사유가 없으니 없던 일로 하자고 선영이 먼저 이혼신고서를 찢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은석은 시험문제 정답을 고르기라도 하는 듯 ‘기타’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우린 참 괜찮은 부부였어.


 은석은 마지막 와인을 들이켰다. 그런 은석의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을 선영은 보았다. 선영 역시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은석은 선영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서로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했다.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몸이었다. 선영은 은석이 떠난 자리보다 그의 채취가 앞으로 더 그리워질 것이라는 예감에 몹시도 서러웠다.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릴 무렵 은석과 선영은 눈물범벅, 땀범벅 된 젖은 몸을 서로 닦아주었다.


 


 아이를 데려온 지 열흘 째, 아이는 여자에게 꽤 다정했다. 여섯 살의 또래 아이답지 않게 투정을 부리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여자가 하는 말을 곧잘 들었다. 반찬 한 가지로도 밥그릇을 뚝딱 비우는 여유도 부렸다. 늘 아이를 궁금해하던 소희 씨는 여자의 집을 자주 찾았고 여자는 그런 소희 씨에게 당분간은 조카와 함께 있을 거라는 말을 전했다. 아이 또한 소희 씨가 올 때면 여자를 이모라 불렀다. 여자는 조금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하는 아이가 고마우면서도 내내 죄책감이 들면서 미안했다. 어쩌다 넘어지면 아픈 기색이 선명하기만 한데 아이는 ‘아프다’라는 말 대신 ‘괜찮다’라는 말로 어른을 위로하는 조숙한 아이였다. 누가 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여자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여자는 아이에게 만화 프로를 틀어주고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이미 버려진 아이라는 건 직감일 뿐이지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여자는 괴롭기만 하다. 아이를 돌려주게 된다면 어떻게 돌려줘야 할까. 아이의 부모는 어떤 사정이 있는 사람들일까. 대체 왜 아이를 찾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여자는‘나는 그날 서울역에서 여섯 살 여자아이를 유괴한 유괴범일 뿐’이라고 자신에게 소리쳤다. 아이에게 엄마 흉내를 내는 자신의 모습이 소름 끼칠 정도였으니깐. 그렇지만 반대쪽에선 아이의 부모가 영영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누구 왔어.


 초인종 소릴 듣지 못했는데 아이가 여자를 불렀다. 누구세요? 택뱁니다. 여자는 문 중앙에 붙어 있는 구멍 사이로 밖을 살폈다. '좋은 택배' 라는 로고가 새겨진 모자가 누런 포장상자를 들고 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름은 없고 주소만 있네요. 여자는 택배 기사에게 사인을 해주고 물건을 받았다. 보낸 이 주소는 없고 받는 이 주소만 있는 소포. 이게 뭐지?


 아이가 호기심 가득 찬 얼굴로 여자를 바라봤다. 이모! 뭐야? 여자는 조심스레 소포를 뜯었다.


 


 소포 안에는 새 옷 냄새가 나는 여자아이 옷 여러 벌과 현금이 든 봉투가 들어 빼앗아 읽어 내려갔다. 여자는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긴장된 모습이었고 아이는 자신의 옷을 짐작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아이를 데려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라가 사는 곳을 알았습니다.


경찰서로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쁜 분 같진 않았습니다.  


저는 가진 것도 없고 아이를 키울 능력도 자격도 없는


철없는 못난 엄마입니다.

어떻게든 아이와 둘이 살아보려고 애를 써봤는데


제힘으로는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어서 이 방법을 택했습니다.


며칠 전, 이곳 놀이터에서 제 아이와 손을 잡고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그쪽이라면 믿을 만할 것 같았습니다.


아이를 포기한 각서 한 장과 제가 가진 돈 전부인 이백만 원입니다.


우리 아이 이름은 김아영이고 올해 여섯 살입니다.


제법 똑똑한 아이라서 이미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만


생일은 2007년 12월 1일입니다.


그럼 부디 절 용서하세요!


- 못난 엄마가 -


 


  여자는 소희 씨를 통해 은석의 재혼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던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6개월 전 이혼 사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배신감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여자는 더는 은석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미 떠났고 그 자리에 손님이 찾아들었다. 영원히 떠나지 않을. 손.님.


 


 우리 이사 가자! 아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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