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25. 8. 13. 로스쿨타임즈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lawschool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04
큰 아이를 유치원에 내려주고, 둘째는 회사 1층에 있는 직장 어린이집에 들여보냈다. 하루 중 가장 어려운 일정 하나를 끝냈다. 후련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오늘 아침은 힘이 하나도 없다. 주말에 충분히 휴식하고 월요일 아침에 산뜻하게 출근하라고 회사가 주휴수당도 지급하는 것일 텐데, 주말을 지낸 월요일 아침 워킹맘에게는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휴.. 한숨을 쉬면서 돌아 나오는데, 얼마 전 AI 관련 업무로 회의했던 디자인팀 차장님을 만났다. 차장님은 둘째의 어린이집 친구 아버지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일은 잘 마무리되셨나요?“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게 바로 조금 전인데, 인사하는 내 목소리가 의외로 힘이 넘쳐서 나조차 깜짝 놀랐다. 아, 내가 업무용 모드로 돌아왔구나. 업무용 모드란 적극적으로 검토 의견을 제시하는 사내 변호사 한수정이다.
내 인생에서 나 스스로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시기는 로스쿨 때이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 3년이었는데, 당시 내가 그런 사람인 척 살 수 있었던 건 ‘로스쿨생’ 모드로 지냈기 때문이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법조인이 되겠다며 생판 처음 법 공부를 시작한 로스쿨 3년 동안, 내가 설정한 ‘이상적인 로스쿨생‘의 모습이 바로 성실하고, 적극적이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입학 당시의 나는 법대생이 절반이었던 동기들과 비교하면 법학 실력이 형편없다 못해 전무했고, 앞으로 창창한 미래가 기대된다기보다는 로스쿨에서 낙오하면 다니던 직장도 잃고 30대 초반의 3년도 잃게 되는 기회비용의 부담을 안고 있는 나이 많은 학생이었다. 모르는 게 많았기에 동기 동생들에게 자주 물어보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겸손해야 했다. 3년이란 제한된 시간 내에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실히 공부해야 했고, 내성적인 성격 탓을 하기에 앞서 교수님들께 질문하고, 조언도 구해야 했다.
눈은 높아서 좋은 직장을 얻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소위 ‘평판 체크‘라는 게 중요했다. 로펌이나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동안 법학 실력도 실력이지만 파트너급에서 눈여겨보는 건 인간성, 그러니까 두루두루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모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내가 만든 이상적인 로스쿨생이 되고자 애썼다. 머릿속으로 그 모습을 그리고, ‘상상 속의 나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할까?’를 먼저 떠올렸다. 신기한 건, 흉내내기로 시작한 행동들이 나중에는 실제로 내 감정까지 다스리기 시작했단 거다.
모 기업 인턴으로 나갔던 때였다. 서류와 면접이라는 엄격한 전형을 거쳐 해당 기업에 나를 포함한 두 명의 인턴이 선발되었다. 일정 기간 동안 실제 법무 담당 직원들과 근무하며 과제를 수행하고, 최종적으로 둘 중 한 명이 사내 변호사로 채용되는 시스템이었다. 둘의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내 머릿속 ‘이상적인 로스쿨생’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는 걸 감추거나 뽐내는 사람이 아니라 ‘최대한 공유하며 서로의 성장을 기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우리 둘은 인턴 기간 동안 사이좋게 잘 지냈고, 마지막까지 당시 회사에서는 ‘둘 중 한 명을 뽑기 너무 어렵다’ 라거나, ‘둘 다 마음에 든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최종 선발된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인턴이었다. 마지막 날 해당 회사의 법무팀장은 나에게 ‘본인이 인턴이었다면 나처럼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졸업하면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인사했다. 아쉽긴 했지만 생각만큼 속상하진 않았다. 이상적인 로스쿨생이라면,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고 결과에 승복하는 사람일 테니까!
로스쿨을 졸업하고 10년째 변호사로 살고 있는 지금, 그때처럼 적극적이고 성실하며 친절한가 생각해 보면, 역시 그때만큼은 아닌 것 같다. 무턱대고 ‘제가 하겠습니다’를 외쳤다가 ‘이 일은 앞으로 법무팀에서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을까 봐 몸을 사리기도 하고, 친절하게 무료로 법률 조언을 조금 했다가 그 사건이 끝날 때까지 계속 신경 쓰게 될까 봐 적당히 선을 그을 시기를 먼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로스쿨 친구들을 만나면, 왠지 다시 적극적이고 성실하며 친절한 사람처럼 말하게 된다.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그리는 일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업무용 모드‘로 활기차게 보내볼까!
출처 : 로스쿨타임즈(https://www.lawschool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