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봄이 오면, <리틀 포레스트>

봄의 서랍에 넣어두는 영화

by 깡주
내가 사는 제주의 벚꽃


완연한 봄이다.

걷다보면 나뭇잎을 흔드는 시원한 바람이 좋고, 머리 위로 내려앉는 따뜻한 햇살도 좋다. 등에 살짝 땀이 베인다. 제주의 4월은 ‘고사리 장마’라 때론 ‘여름의 비’처럼 쏟아지기도 하고, 지독한 안개도 자주 만난다. 이맘 때쯤 되면 맥주 한 캔 하면서 꼭 보는 ‘나의 봄 영화’가 있다.


<리틀 포레스트>.

원래 원작인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해마다 봤다. 시골에 사는 젊은 여자 주인공은 계절마다 스스로 먹거리를 기르고, 손수 정성을 들여 소박한 한 그릇의 음식을 만들어 내고 감사히 먹는다. 주인공 여배우가 멋진 것도, 스토리가 흥미진진한 것도 아니다. 그냥 음식을 만드는 장면들이 참 좋았다. 그리고 수년 전, 임순례 감독이 만든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했다. 새 학기를 앞둔 봄이었다. 제주에 온 지 딱 1년이 된 우리 네 식구는 ‘새 학기 맞이 저녁 외식’을 하고, (외식비가 비싼 제주에서 외식이 하고 싶을 때는 꼭 이렇게 타이틀을 붙여 명분을 만든다) 김태리 배우가 주연인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한 극장으로 갔다.


인상 깊었던 첫 장면은 대사 없이 사박사박 하얀 숲길을 걸어 시골집으로 가는 혜원(태리 분)의 모습이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강단을 보여주는 듯하다. 대학 졸업 후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남자 친구랑도 어정쩡하게 헤어진 후,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것 없는 서울 생활을 던지고 고요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향 집으로 돌아온 혜원. 냉기가 가득한 빈집으로 들어가 화로에 불을 지피고, 남아있는 한 줌의 쌀로 밥을 짓고, 눈밭에서 캐낸 배추와 파로 끓인 된장국을 달게 먹는 모습은 분명 숨죽이며 볼만한 장면이 아닌데, 몰입도가 높다. 혜원이 밥을 다 먹고 난 후 마루에 드러눕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내게 그 달큰한 피로가 몰려온다.


취향에 맞지 않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코를 골며 잘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나는 장면 하나하나가 포근하고 달다. 혜원은 시골집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농사를 짓고,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혹은 혼자서도 오롯이 그 한 그릇을 즐긴다. 빨갛게 끓인 수제비와 배추전, 봄 향기 가득 밴 아카시아 꽃 튀김, 아삭한 오이 콩국수, 양배추와 삶은 달걀로 속을 만든 정갈한 샌드위치, 추위와 함께 먹는 알싸한 막걸리와 김치전, 무한한 정성이 들어간 가을의 단밤조림...... 배고파서 시골집으로 왔다는 혜원의 대사는 진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내 배를 허기지게 하지만, 가슴은 따끈한 국물을 마신 것처럼 만족스럽게 한다.


이 영화의 백미는 끝부분에 있다. 일본판으로 볼 때는 정서가 달라서였는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시골에서 몸으로는 바쁘게 지내면서도 정작 자신이 부딪혀야 할 문제에서 도망쳐 있는 혜원을 콕 짚어 말해주는 친구 재하의 충고. 혜원은 용기를 내, 도망쳐 왔던 현실로 씩씩하게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고 당당하게 그리운 고향 집으로 온다.


나에게도 저렇게 가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고약한 버릇이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외면해 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다른 것에 부지런을 떤다. 시험기간에 정작 공부는 안 하고 책상 정리만 하다가 진이 빠지는 아이였다. 무언가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데 용기가 안 생기는 그런 때 소위 ‘딴짓’에 몰두했다. 그 버릇은 어른이 된 지금도 남아, 가끔 해결해야 하는 1번 문제를 두고 7~8번째 일에 열심을 쏟는다.


그래서 나는 봄엔 <리틀 포레스트>를 본다.

이 영화는 내게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하는 계절 봄, 용기를 내고 내게 주어진 문제를 바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래서 매년 봄이면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 것이 일종의 ‘기도와 같은 의식’이 되었다.

겁이 나서 포기하고 싶고 주저하는 약한 마음을 이기고, 하고 싶지 않은 일에서 도망치지 않고, 7~8번째 일이 아니라 1번째 일에 정면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영화. 그러나 또 뭐 그렇게 비장하기만 할까. 소파에 기대어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소박하고 정겨운 요리 장면을 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봄날의 즐거움이다.

나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봄이 되면, <리틀 포레스트>를 찾아볼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일들에 도전할 용기를 얻을 것이다. 꼭 그렇기를. 용기 있는 그러나 즐거운 호호 할머니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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