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일본과의 공조 제도의 형성
AI 전쟁의 무대는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은 빅테크(Big Tech) 플랫폼을 앞세워 세계를 장악하려 하고, 중국은 기술적·문화적 이유로 독자 체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 일본, 유럽은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새로운 범용 AI를 만들어 미국이나 중국과 맞붙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선택지는 하나, 곧 국제 연대와 규범의 구축이다.
데이터 이동 규칙 : 핵심 데이터는 외국 기업이 무단으로 학습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특정 기업이나 국가가 임의로 저장·가공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문화적 다양성 보장 : 다국어·다문화 데이터셋을 강제하여 특정 언어와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플랫폼 책임 강화 : 글로벌 기업과 국내 기업 모두 투명한 데이터 공개와 책임 있는 사용을 법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감사와 투명성 확보 : 학습 데이터와 필터링 기준을 공개하고, 외부 기관의 감사를 받도록 해야 한다.
이 네 가지 원칙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실제로 국제 협약과 표준을 통해 제도화할 수 있는 과제이다. 기술이 자본과 속도를 무기로 삼는다면, 규범은 사회적 합의와 책임을 무기로 삼는다.
EU는 GDPR과 AI Act를 통해 규범을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였다. GDPR은 단순한 유럽 내부 규제가 아니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서비스 약관을 전 세계적으로 바꿔야 했고, 수십억 유로의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이는 데이터 규범이 국경을 넘어 사실상의 세계 표준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AI Act 역시 위험 기반 규제 체계를 도입해, 사회적 평점이나 감정 인식 같은 금지 영역을 명확히 하고, 고위험 AI의 책임을 강화했다. 이는 ‘규범의 수출’이 어떻게 현실적인 힘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은 온디바이스·경량 AI, 제조업 융합에서 강점을 보유한다. 특히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로봇 안전 기준을 선도했던 경험은, 일본이 기술 표준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발언권을 확보해 온 역사를 보여준다.
한국은 반도체, ICT 인프라, 그리고 최소 범용 역량을 무기로 협상 테이블에 설 수 있다. 동시에 한류 콘텐츠와 다국어 데이터 축적 능력은 문화적 다양성 규범에서 중요한 카드가 될 수 있다. 한국은 기술과 문화, 두 영역에서 모두 협상 자산을 보유한 드문 국가다.
만약 한국이 규범 연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의 데이터는 빅테크에 흡수되어 단순 소비재로 전락할 것이고, 교육과 의료 같은 민감한 영역마저 외부 플랫폼에 종속될 수 있다. 동시에 한국 문화는 다수 언어의 뒤로 밀려나, 한류가 전 세계에서 차지한 성과마저 지속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이 유럽과 일본과 손잡고 다국어 데이터 규범, 교육용 AI의 투명성 규칙 등을 선도한다면, 한국은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규범의 생산자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 선택은 한국 사회 내부의 민주주의 수준과도 연결된다. 데이터 규범은 곧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이터 주권과 문화적 다양성은 특정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이다. 미국의 빅테크나 중국의 AI의 단순 소비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국가는 더 많다. 한국, 일본, 유럽이 독자 범용 AI를 만든다 해도 이를 타국에 강요한다면 결국 미국과 중국의 길을 되풀이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기술 패권이 아니라 규범의 연대를 선택할 도덕적 명분은 충분하다.
미국은 빅테크 플랫폼, 중국은 독자 체계. 그 사이에서 한국·EU·일본은 국제 규범이라는 제3의 플랫폼을 세워야 한다. 이는 단일 기술이 아니라 공정한 규칙과 다양성을 보장하는 새로운 질서이다. AI 전쟁에서 승자가 단 하나일 필요는 없다. 기술의 전쟁을 넘어 규범의 전쟁에서, 우리는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단순히 국가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 규범은 결국 인간 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킬 것인가에 대한 집단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데이터 주권은 곧 개인의 존엄이며, 문화적 다양성은 인류가 함께 축적한 역사적 자산이다. 따라서 제3의 플랫폼은 기술적 장벽을 세우는 방어선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합의로 자리 잡아야 한다.
여기서 한국·일본·유럽의 연대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초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도덕적 책무이다. AI 시대에 우리가 세우는 규범은 단지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어떤 조건을 유지해야 하는가를 묻는 실존적 선택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책임을 ‘행위의 결과를 끝까지 감당하는 용기’라고 정의했다¹. 오늘날 AI 시대의 책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규범을 세우지 못한다면, 기술은 인간을 대신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 책임 없는 기술은 곧 권력의 도구가 되고, 권력은 인간을 압도하는 기계적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규범을 세운다면, AI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AI 시대의 과제는 기술적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질문과 규범, 그리고 선택이 어떤 미래를 만들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한국, 일본, 유럽이 제3의 플랫폼을 세우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이러한 성찰의 첫걸음이다. AI 전쟁의 최종 승자는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지켜낸 인류 전체여야 한다.
¹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1958.
² Shoshana Zuboff,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 2019.
³ Kenneth Waltz,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 1979.
⁴ Manuel Castells, The Rise of the Network Society, 1996.
⁵ GDPR (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 EU, 2016) – 개인 데이터 보호, 접근·삭제·이동권 보장, 책임성 원칙, 국제 전송 제한.
⁶ AI Act (Artificial Intelligence Act, EU, 2024) – 위험 기반 규제, 사회적 평점·기만적 AI 금지, 고위험 AI의 데이터 품질·투명성·감독 의무, 범용 AI의 리스크 평가 및 보고 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