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 교육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한국 교육의 문제를 흔히 “과도한 경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적절한가. 교육의 본질은 경쟁의 크기를 재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를, 어떤 미래에도 적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길러내는 데 있다.
경쟁은 인간 사회에서 줄일 수 없는 조건이다. 인구와 자원의 불균형, 사회적 지위와 기회의 희소성은 언제나 경쟁을 낳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경쟁”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일지 모른다. “과도하다”는 말은 얼핏 공감대를 얻지만, 실은 본질을 가리기도 한다. 경쟁을 없앨 수 없으니, 결국 우리는 그것을 은폐하거나 배제하려는 시도를 반복해 왔다. 그러나 그 길은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경쟁을 무조건 줄이려는 발상은 현실을 왜곡할 뿐이며, 결국 교육을 공허한 이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경쟁이 불가피하다면, 더 공평하고 더 바람직한 목표를 향한 경쟁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공부는 본래 즐거움일 수 있다. 작은 하나를 이해했을 때의 환희, 그것이 쌓여 세상을 넓혀준다. 교육이 없다면 우리는 베토벤의 음악, 멜빌의 문학, 마티스의 색채를 이해할 길이 없다. 지식의 습득은 단순한 정보의 추가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확장시키는 과정이다.
그런데도 공부가 고통으로 불리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결과만을 집착하는 사회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겨우 이것?”이라는 말 한마디가 작은 깨달음의 기쁨을 앗아간다. 공부의 고통은 공부 그 자체가 아니라,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학습 과정의 가치가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학생이 공부를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욱이 ‘공부=고통’이라는 사고는 근대 서구의 학교제도에서 비롯된 규율과 훈육의 산물일 뿐이다. 원래 학습은 인간이 언어를 익히고 자연을 관찰하며 지혜를 나누던 즐거운 행위였다. 따라서 고통이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교육의 목적을 다시 세울 수 있다.
물론 교육에는 선발의 기능이 있다. 하지만 만약 오직 선발만이 목표라면, 굳이 수학·과학이 아니어도 된다. 봉제 기술로 선발해도 되지 않을까? 홈질과 박음질을 기본으로, 상침·휘갑치기·스티치 중 하나를 선택과목으로 삼아 대입을 결정한다면, 그것 역시 선발의 한 방식일 것이다. 한국인의 교육열이라면 멀지 않아 미싱으로 금당벽화나 모나리자를 재현해 낼지도 모른다.
이 풍자는 결국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경쟁하는가?” 선발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교육은 본질을 잃고 기술적 요령의 경쟁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교육이 진정한 가치를 지니려면, 선발을 넘어서는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즉, 교육은 단순히 누군가를 걸러내는 과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적 역량을 높이는 장치여야 한다.
만약 교육이 단순히 선발이 아니라면, 우리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경쟁을 만들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누구나 갖추면 가장 좋은 것에 대한 경쟁 말이다. 그것은 기초지식, 문해력, 그리고 메타인지라고 나는 믿는다.
이 세 요소는 국제기구와 학계에서도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교육의 핵심이다. OECD나 UNESCO, 그리고 PISA의 평가 목표 역시 학문적 전문성이 아니라 기초지식, 문해력, 자기조절 능력을 국가 발전의 토대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중심으로 경쟁을 설계하는 것은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세계적 합의에 닿아 있는 방향이다. 이런 요소들이야말로 국가의 미래를 떠받칠 토대이며, 공정한 경쟁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사회도 그 필요성을 알면서, 교육과 평가의 어려움 때문에 소수에게만 이 능력을 길러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기술이 그것을 돕는다. 예컨대 AI 기반의 개별화 학습 도구나 적응형 평가 시스템은 학생들의 문해력과 메타인지를 직접 측정하고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만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라져야 한다. 결과만을 숭배하고 과정을 무시하는 사회라면, 기술은 또 다른 실패의 도구가 될 뿐이다. AI조차 평가와 학습을 왜곡시키는 기제로 전락할 수 있다. 기술은 결코 목적이 아니며, 교육을 제대로 설계하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사교육 상품으로 변질될 수 있다.
AI는 여전히 낯설고 두렵다. 편향된 답을 주는 건 아닐까, 공정한 평가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감시 장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극복 가능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AI는 문해력과 메타인지를 평가하고 학습하게 하는 수단으로,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기술이 불러올 변화가 두렵더라도, 우리가 지향점을 분명히 한다면 그것은 교육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세상의 많은 나라들이 교육에 목숨을 건다. 각 나라마다 방식과 철학은 다르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충분한 기초지식, 문해력, 메타인지를 지닌 인재를 길러내는 것을 포기한 국가는 없다. OECD 교육지표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국가는 GDP의 상당 부분을 교육에 투자하며 이 목표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육은 어떠한가. 기초지식과 문해력, 메타인지라는 가장 본질적 경쟁을 외면한 채, 여전히 점수와 결과에만 매달려 있다. 이제는 질문해야 한다. 한국 교육의 중심에 서 있는 제도가 과연 이 본질을 담고 있는가.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한국은 단순히 경쟁의 크기만 키우는 소모적 전쟁에 갇힐 것이다.
그 제도가 바로 수능이다. 수능은 한국 교육의 모든 문제를 압축한 최종 보스이다. 그렇기에 수능을 단순히 한 시험으로만 볼 수 없다. 수능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하는가가 한국 교육의 성패를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이 시험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혹은 다시 설계되어야 하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수능 논의는 단지 입시 제도의 조정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