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고 본 것은 아닐 수 있다.

메타인지를 위한 제안

by 채현

갈릴레이는 무거운 추와 가벼운 추를 동시에 떨어뜨렸을 때, 둘 다 동시에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년 만에 생각이 바뀐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라도 두 물체가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을까?
왜 그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보았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감각은 있었으되, 그 감각을 사유하려는 시선이 없었던 것이다.

그 단순한 장면이 인류의 사고 구조를 드러낸다.
우리는 감각했으나, 감각을 사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험’이라 불리는 것에도 층위가 있다.


경험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첫째는 감각적 경험이다.
이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직접적 자극의 단계다.
그러나 감각만으로는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것을 보고 들어도, 그 경험이 사고의 구조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단지 기억의 파편으로 남는다.
2천 년 동안 사람들은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 사실을 질문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감각의 범위에 머물렀다.


둘째는 인지적 경험이다.
감각이 의미로 변하는 순간은 오직 질문이 개입할 때다.
‘왜 저 물체는 그렇게 움직이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면, 감각은 인지로 변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강요된 주의가 아니라, 스스로 주의를 기울이려는 자발성이다.
인지적 경험은 타인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의미를 느끼는 순간, 그 감각은 비로소 나의 세계가 된다.


셋째는 반성적 경험이다.
인지한 내용을 다시 바라보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를 묻는 단계다.
이 순간부터 메타인지가 작동한다.
반성적 경험은 단순히 틀린 것을 고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 구조를 돌아보는 일이다.
여기서 경험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전환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각적 경험이 자동으로 지혜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미술관이나 과학관을 방문한 후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느꼈어?”라고 묻는 것이 그 대표적 예다.
감각적 경험이 바로 반성적 경험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아직 사물의 구조를 해석할 개념이 없는데, 느낀 점을 말하라고 요구한다.
감각적 경험만 있는 상태에서 반성을 강요하니, 그 반성은 형식이 되고 의미는 사라진다.
반성은 명령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생각에 긴장이 생길 때, 조용히 내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질문의 여백’이다.

아이에게 인지적 경험을 만들어주려면 먼저 자발적 관심의 장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여행 중 하루쯤은 아이에게 일정을 맡겨보는 것이다.
어떤 곳을 가고 싶은지, 왜 거기를 먼저 가고 싶은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면, 아이는 그 순간부터 ‘보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이 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즐겁든 실망스럽든, 아이는 자신이 만든 경험을 통해 의미를 배우게 된다.

경험은 쌓인다고 깊어지지 않는다.
의미는 언제나 해석과 반성에서 태어난다.
갈릴레이가 세상을 바꾼 것은 망원경이 아니라 시선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더 많은 경험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시작하는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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