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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맘 Feb 17. 2020

프롤로그 prologue

청개구리 부부의 80일간의 세계일주 21개월 우주여행

지난주까지 우리 부부는 각자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다녀왔다. 진짜 세계일주는 아니고 아이 낳고 매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다 보니 우리는 잠시 휴전이 필요하였고, 각자 혼자의 세계를 여행한 그 시간이 우연하게 꼭 80일이라서 나는 그 침묵의 시간에 J. 베른의 소설 제목을 붙였다.


최근에 큰 화제가 되었던 영화 ‘결혼이야기’에서는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기에 지친 젊은 부부가 이혼을 결심한다. 처음에는 적당히 합의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와이프가 우연히 말 잘하는 변호사를 만나 상황은 반전된다. 둘은 흔히 말하는 진흙탕 싸움을 시작한다. 서로를 벼랑까지 몰고 서로의 바닥까지 보고 나서야 상황은 종료되고, 둘 다 막대한 변호사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이혼은 성립된다. 그리고 둘은 모든 싸움이 끝나고 이혼을 한 후에야 다시 대화를 나누고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가끔 인생에는 그렇게 끝을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끝까지 가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다만 나는 웬만한 변호사보다 말을 잘하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고, (남편은 자신의 모국어로, 나는 제2외국어로 대화를 나누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끔 싸우다 내 기세가 눌릴 때마다 괜히 억울한 나는 지금부터 영어를 쓰자고 해보기도 했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변호사 비용을 지불할 능력도 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끝까지 입을 다무는 방법을 선택했다. 우리는 둘 다 고집이 세서 아이를 낳기 전에도 침묵 전쟁을 종종 했지만, 외국에서 남편 하나 친구로 두고 살던 나는 늘 먼저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남편은 나와 아이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해서 심심한지, 평소 그렇게 많은 말을 하던 입이 슬슬 근질근질한지, 자꾸 혼잣말을 하듯 나에게 먼저 항복의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이제 곧잘 한국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는 21개월 말동무가 생겼고, 나는 남편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 침묵 전쟁을 끝까지 한 번 해봐야 할 것 같았다.


21개월 엄마의 말동무 “엄마랑 코 잘까? 그럼 방문 닫고 오세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2년 전 새해가 밝았을 때 나는 임신 19주를 지나고 있었고, 불안했던 임신 초기를 지나 안정된 중기에 접어들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둘 다 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만을 위해 호주 남서부에 있는 퍼스(Perth) 여행을 가고 싶었다. 남편은 그전까지 항상 내가 세우는 여행 계획에 동의했었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욜로족으로 살던 우리는 딱히 모아둔 돈이 없었고,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조금이라도 더 저축을 하자고 했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남편의 말에 동의했고, 대신에 우리는 텐트를 가지고 친구들과의 캠핑을 계획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평소 여행 계획을 잘 짜던 나는 그때도 친구들을 대표해서 캠핑 장소 및 일정을 정했다. 다 같이 모이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길이 험해서 SUV 이상의 차들만 진입이 가능한 오프로드(off road)였고 우리 차는 들어갈 수 없었다. 호주는 워낙 땅이 커서 도시 아닌 외곽 지역에서는 폰도 잘 터지지 않는다. 우리 부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계획을 세운 여행이었고, 친구들을 만나려면 차 바닥을 다 긁어가며 그 길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전까지 우리가 빅토리아주 주변으로 최소 열 번 이상의 캠핑 여행을 다녔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친구들 차는 다 SUV 였고, 우리 차만 여기저기 다 망가져서 천불 넘게 수리비가 나왔다. 남편은 나에게 잘 알아보지 않고 왜 하필 이런 곳을 골랐느냐고 질책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임신 중인 상태이고 호르몬의 장난으로 심신이 힘들어 죽겠는데, 남편에게 그런 욕까지 먹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제까지 그렇게 많이 여행 다니면서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와보지 않고 어떻게 미리 아냐고! 구글맵도 내비게이션도 길이 포장인지 비포장인지는 알려주지 않잖아! 그래서 내가 진작 퍼스 가자고 했지!”



차 수리비 천불은 정확히 멜버른에서 퍼스까지 왕복 두 사람 비행기 요금이었고, 그 돈을 주고 수리한 차는 고치고 나서도 내내 잦은 말썽으로 속을 썩이더니, 결국 일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어느 날 길에서 퍼져버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모든 상황들이 계속 이와 같았다. 우리는 둘 다 모르는 길로 처음 가보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고 하는 일이 역으로 서로를 힘들게만 하였다. 그 여행에서 차가 망가졌을 때는 우리와 함께 카센터까지 가준 친구들이라도 있었지만, 내 나라가 아닌 이곳에서 아이를 처음 낳고 키우며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임신 19주차 여행 중이던 우리





아이가 태어나고 정확히 일 년 후, 나는 임신 전보다 10킬로가 빠졌고 남편은 10킬로가 쪘다. 보통은 출산 후에 와이프는 임신으로 불어난 몸이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고, 남편은 가정과 회사의 이중고에 식사도 부실해져서 살이 빠진다고들 하던데 우리는 정반대였다. 나는 일 년간 모유수유로 아이에게 젖뿐만 아니라 기(氣)를 쪽쪽 빨려가며, 밤에 잠을 자지 못해서 하루하루 시들시들 해져갔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매일 설탕 범벅인 주전부리로 허기를 달래던 남편의 복부는 마치 둘째 아이라도 잉태한 듯 나날이 부풀어 올랐다. 우리는 그런 우리를 청개구리 부부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귀한 완도산 산모용 미역을 불려 미역국을 끓였다. 출산 직후라서 찬물에 손이 닿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만큼 손이 시렸다. 애 낳고 내 손으로 직접 미역국을 끓여야 하는 일도 참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 애를 낳았는데 이런 바다 풀때기를 먹고 어떻게 힘이 나겠냐며, 기름에 고기를 잔뜩 볶아서 만든 토마토 스튜 한 솥을 남편이 끓여주었을 때 나는 더 황당했다. 차마 모유수유 중에 이렇게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유선이 막혀서 유선염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일단은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 집 셰프는 요리는 좋아하지만 뒷정리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무거운 냄비와 그릇들을 씻고 정리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열흘만에 바깥출입을 하기 시작했다. 열흘간 제대로 잠을 못 자서 머리는 멍하고, 젖이 막 돌기 시작하면서 딱딱한 가슴은 터질 듯 아프고, 호르몬은 최고조에 달했는지 아이만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났다. 남편은 이럴 때일수록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산후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아이를 꽁꽁 싸매고 우리는 매일 동네 산책을 하고 마트에 장을 보러 나갔다. 5월 말 호주 멜버른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초겨울 날씨였고, 나는 속으로 이러다 산후풍이 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애를 낳고 바로 찬바람을 맞으면 몸에 찬 기운이 돈다고, 그래서 군불을 지피고 뜨끈한 방에서 백일 간 산후조리를 해야 한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을 해봤자 외국인 남편은 아예 알아듣지를 못했다.



슬링 아기띠를 하고 마트에서 계산을 하고있는 남편 (생후 12일)
마트 쇼핑카트에서 자고있는 우리 어린양 (생후 59일)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남편과 같이 산지 3년, 남편의 모국어가 나에게는 외국어이긴 했지만 대화를 나누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속내를 터놓고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궁합 좋은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출산 직후부터 계속 잠을 자지 못해서 (호주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캥거루 케어에 모자동실을 한다!) 도통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24시간 어떻게 해도 울기만 하는 아이를 돌보느라 체력과 정신력은 나날이 방전되어 갔다. 피곤하니 말이 잘 들리지도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하물며 외국어로 말을 해야 하니 피로만 쌓이고 더 소통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입맛도 맞지 않았다. 우리는 원래 서로의 음식을 꽤 잘 먹는 편이었다.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삼겹살을 사서 집에서 구워 먹었고, 우리 집 냉장고에는 내가 아닌 남편 때문에 늘 김치가 있었다. 이란에 좀 살았던 나는 이란 음식들을 대체로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고르메 사브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란 음식이었다. 그런데 내 몸이 힘들고 지칠수록 내 속은 자꾸만 한국 음식을 원하고 있었다. 남편이 고르메 사브지를 한솥 끓여놓고 출근하면, 한 끼는 맛있게 먹었지만 두 끼는 먹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도 음식이 많이 남아있는 솥 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많이 만들어놓은 남편에게 괜히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것은 남편도 같았다. 예전보다 더 이란 음식을 그리워했고 내가 같이 먹지 않는 것을 서운해했다.


언어와 식성의 장벽을 넘어 마음의 장벽도 쌓였다. 밤에 아기침대를 사용하지 않고 내가 아이와 같이 자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수유 텀이 짧고 밤에도 수유를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음날 일을 하러 가야 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였고, 백일쯤 지나면 통잠을 자겠지 다들 말하는 기적이 오겠지 싶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돌이 지나 모유수유를 끊고 나서도, 곧 두 돌인 지금도 통잠을 자지 못한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꼭 한 달 전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나는 지금까지 안방에서 딱 한 달밖에 자보지 못했다. 남편은 그것을 초기에 수면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내 탓으로 돌렸고, 나는 밤에 제대로 잠 못 자는 것도 억울하고 화가 나서 죽겠는데, 이런 말 같지 않은 소리나 하고 있는 남편과 점점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아이의 더딘 성장과 수면 문제로 우리는 지금까지 열 손가락도 훨씬 넘는 의사와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늘 이론 중심의 여러 방법들을 제시했다. 나는 그런 방법들이 실전에서 (내가 못하겠거나 아이가 따라주지 않을 것 같은 이유로) 안 먹힐 것을 속으로는 알면서도, 그들의 전문성과 권위를 고려하여 매번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척을 하였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남편은 어느 날 마치 신문고라도 두들기듯이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제 와이프 말을 절대로 믿지 마세요. 지금 저렇게 선생님 말씀에 다 동의하고 그대로 다할 것 같죠? 집에 가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해요.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고 할 거예요. 제가 안 봐도 알아요. 해피 와이프 해피 라이프 (Happy wife, Happy life)라고 들어보셨죠? 사실 지금 저는 애가 잠을 안 자는 것보다, 잠 못 자서 미쳐버린 제 와이프 때문에 더 힘들어요!”


호주에서는 보통 그런 클리닉을 가면 아이도 아이지만 부모의 심리 검사도 추가로 한다. 담당자는 우리 둘의 검사지를 받아 들고 점수를 매기더니, 나는 괜찮은데 남편이 우울증 정도가 심각하다며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순간 너무 오래 잠을 자지 못해 미쳐버린 나는 그 자리에서 폭소를 하며 평소 나답지 않게 말했다. 남편은 내가 이렇게 한국어도 페르시아어도 아닌 영어로, 그것도 낯선 사람에게 솔직하게 내 속을 보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선생님, 진짜 우울한 사람은 저거든요. 근데 저는 동양인이라 아무리 힘들어도 밖으로는 괜찮다고 말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자랐어요. 특히 잘 모르는 타인에게나 사회에서, 이런 공식적인 기록이 남는 검사지에서는 말이죠. 남편은 정반대예요. 이렇게 누구든 어디든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스트레스를 밖으로 내보내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제 속으로 스트레스를 쌓아놓아요.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에게만 겨우 제가 힘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요!”


아이와 함께 하는 부모 삶의 행복을 묻는 검사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기저귀를 갈고 옷 입히고 속싸개를 싸는 일을 나보다 남편이 훨씬 잘했다. 나는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어떻게 씻겨야 할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는데, 남편은 어디서 애 셋은 키우고 온 사람처럼 능숙하게 아이 목욕을 시켰다. 남편이 애를 잘 봐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으나, 뭐든 잘하는 사람은 목소리도 커지게 마련이다. 육아 방식에 있어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남편은 항상 자기주장을 펼쳤고,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내가 어떻게 이제껏 이 남자랑 같이 살았지 싶을 만큼, 사사건건 아이에 관한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의 답은 정반대였다. 사공이 둘인 우리 집 배는 침몰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가 이유 없이 울면 남편은 바로 아기용 진통제를 꺼냈다.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해서 우는 것이니 약으로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단다. 같은 상황에서 나는 아이가 말을 못 하니 꼭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의사표현 수단으로 그냥 우는 것일 수도 있는데, 왜 신생아에게 굳이 약부터 먹이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가 자꾸 밤에 깰 때도, 이앓이로 하루 종일 보챌 때도, 감기에 걸려 콧물이 날 때도 남편은 약을 사 왔다. 그것이 남편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나와 아이를 도와주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꾸만 갓난쟁이에게 쓸데없는 약을 먹이려고 하는 남편이 더 문제였다. 퇴근하고 바로 집에 오지 않고 약국에 들러서, 약사가 추천하는 약에 대한 설명을 나에게 전화로 들려주는 남편에게, 와이프 마음 알아주는 남편을 위한 약은 안 파는지 물어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됐다. 남편의 폰번호를 남편의 이름에서 아빠로 바꾸었다. 새벽에 아이의 얼굴도 못 보고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나는 매일 문자로 아이의 사진을 보내준다. 그리고 아이가 필요한 것도 같이 적어서 보낸다. 오늘의 품목은 면봉, 로션, 목욕 오일, 남편 아니 아빠가 퇴근길에 사 와야 하는 아이의 물건들이었다. 아빠 아니 남편에게 답이 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휴식, 섹스, 그리고 여행이란다. 늘 실없다 생각했던 그의 농에 제대로 허를 찔려서 나는 실없이 웃음으로 대꾸했다.


나는 지금까지 아이의 옷을 500벌 이상 샀다. 내 평생 산 옷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많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철만 바뀌면 내 옷 좀 사 입으라는 잔소리를 했다.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가라고 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열두 번쯤 말했는데 나는 한 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매일 거울을 봐도 한 달에 한 번쯤 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까지 살이 빠져서 결혼반지가 맞지 않았다. 한 번은 밖에 끼고 나갔다가 헐렁한 반지가 미끄러져서 잃어버릴 뻔 한 이후로 더는 아예 낄 생각도 하지 않았다.


80일의 세계일주가 끝나기 일주일 전 1월의 마지막 날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 있었다. 남편은 퇴근 후 선물 꾸러미 하나를 가지고 집에 들어오더니 아무 말 없이 식탁 위에 놓아두었다. 나는 그것을 일주일간 열어보지 않았지만, 겉포장만 봐도 내가 쓰기에는 사치스러운 향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마침 폼 클렌저가 떨어져서 비누로 열흘 넘게 세수를 하고 있던 나는 이런 우리의 모습이 참 우스꽝스러웠다. 일주일 후에 어떤 기회로 (아이의 성장 발달이 늦어 또 상담을 받으러 갔다!) 서로의 말문이 트이고 남편이 정식으로 선물을 내밀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이 향수를 얼마 주고 샀느냐고 물어보는 멍청하고 미련스러운 와이프였다. 이거 하나 살 돈이면 폼 클렌저 몇십 개는 살 수 있겠다 생각하면서.






요즘 내가 브런치에 쓰고 있는 글의 전체 조회수가 운이 좋게도 감사하게도 십만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나 내가 제일 내 글을 보여주고 싶은 단 한 사람, 남편에게 내 글을 보여줄 수가 없어서 못내 아쉬울 뿐이다. 말과 글은 또 다르니까,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글로 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밸런타인을 맞아서 남편에게 카드를 썼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한국 모 기업의 광고 카피는 틀린 거야.
우리는 말을 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고,
반드시 마음을 말로 전해야만 해.
그래서 나는 지금 당신에게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그리고 나 스스로도 까맣게 잊고 사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줘서 고마워.”


남편이 나에게 편지를 잘 썼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외국어로 쓴 글도 그 정도인데 한국어로 쓴 글은 얼마나 잘 썼겠냐며, 읽을 수 없으니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남편에게 나는 브런치 글 조회수를 있는 대로 잘난 체하였다. 남편은 그렇게 또 나에게 속아주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2020 밸런타인 해피 코알라 카드







우리는 아이가 돌이 지날 때까지 상하의가 분리되지 않고 지퍼만 쭉 올리면 되는 우주복을 자주 입혔다. 그래서 아이의 수많은 별명 중의 하나는 우주인이었다. 그 우주 생명체 하나 우리 집에 침공하여 일으키는 요상한 파장으로 지구인들의 대화는 굴절되었고 지구인들의 웃음은 소멸되었다. 그러나 테드 창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도 나오듯, 우리는 최후의 죽음을 알고도 미래의 불행을 알고도 현재 이 삶을 선택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우리는 생이 다할 때까지 이 우주인과 함께하는 여행을 멈출 수 없다.


얼마 전 우리는 아이의 두 돌 생일 기념으로 퍼스(Perth)로 가는 세 사람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삼 년 만에 타보는 비행기라 아직 타지 않고도 기분이 두둥실 날아올랐다. 그리고 만약 그때 퍼스를 다녀왔다면 두 돌 아이와 함께 만드는 그곳에서의 추억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국내선이지만 4시간 반을 타야 하는 비행기에서 요새 한창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얌전히 앉아있을 수 있을지. 혼이 다 빠진 엄마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 다시는 비행기를 안 타겠다고 선언할지도 모를 일이다.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고 싶고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살고 싶다.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용감하게 갈 수 있고,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젖 먹던 힘까지 죽을 힘까지 써서 살 수도 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이든, 21개월의 우주여행이든, 우리는 갈 것이고 살아남을 것이다. 끝까지 이 길과 이 삶을 함께 여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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