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전 밥을 먹다 숟가락을 든 채 멈칫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숟가락이 눈앞에서 뿌옇게 뭉개졌다. 처음엔 식당 조명이 어두운 탓이라 여겼다. 그게 아니면 스마트폰 불빛에 혹사당한 각막이 투정을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낮 환한 카페에서조차 서류의 활자마저 도망치듯 흐려졌을 때 인정해야 했다. 마흔 중반의 나이, 기어이 그 불청객이 내게도 찾아왔다는 것을.
"노안이 시작되셨네요.”. 안과 의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마치 감기 진단을 내리듯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하지만 내게는 중년의 서막을 알리는 공식적인 메세지였다. 새 업무용 안경을 맞추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콧잔등을 누르는 이 렌즈의 무게가 단순히 시력 보정 도구의 무게만은 아님을 직감했다.
우리는 흔히 노안을 상실의 관점에서 본다. 젊음도, 수정체의 탄력도, 가까운 것을 보는 능력도 잃는 것이니까.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이 인간을 설계할 때 생의 절반을 넘긴 시점에 굳이 가까운 것을 흐리게 만든 데에는 필히 오묘한 뜻이 숨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건 퇴화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위치를 강제로 옮겨놓으려는 뜻밖의 배려일지도.
안경 너머로 보정된 내 젊은 날의 눈은 그야말로 현미경이었다. 코앞의 성취, 당장 손에 쥐어질 이익, 바로 앞 타인의 결점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래서 그토록 치열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피로했다. 가까운 게 잘 보인다는 건 축복이자 저주였다. 남의 작은 실수가 큰 결함인 것처럼 보였고, 당장의 손해가 내 눈앞의 시야를 가렸다. 나는 근시안적인 욕망에 갇혀 숲을 보지 못한 채 나무 옹이 하나에 집착하며 울고 웃었다. 참으로 근시안적인 욕망의 나날이었다.
이제 내 몸이 나에게 명령한다. "그만 좀 봐라. 너무 가까이서 보지 마라."
노안은 물리적인 거리두기를 강요한다. 책이든 스마트폰이든 팔을 쭉 뻗어야 비로소 초점이 잡힌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며 놀려대지만 나는 이 자세가 꽤 철학적이라 생각한다. 무언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것이 흐릿해지니 비로소 먼 곳이 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놀라운 역설이다. 코앞의 밥알은 뭉개져 보이는데 창밖 풍경이나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 그리고 나와 얽힌 사람들의 전체적인 윤곽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젊은 날엔 득실을 따질 때 계산기를 눈앞에 들이대고 소수점까지 쪼개어 봤다. 이젠 계산기를 멀찍이 놓아야 숫자가 잘 보인다. 딱 그 물리적 거리만큼 마음에도 틈이 생긴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이 선택이 불러올 파장과 나와 타인의 관계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의 결과까지 널찍하게 조망하게 된다. 내가 더 너그러워져서가 아니다. 그저 내 눈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좁쌀만 한 이득을 보려 미간을 찌푸리는 것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전체 판을 보는 편이 훨씬 편안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건 렌즈를 갈아 끼우는 과정이다. 20대와 30대가 특정 피사체만 선명하게 남기고 나머지를 날려버리는 '아웃포커싱'의 시간이었다면, 노안이 찾아온 40대는 피사체와 배경을 모두 담아내는 '팬포커싱'의 세계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주변과 소외되었던 배경들 그리고 나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타인의 풍경이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안경을 벗고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날카롭던 경계선들이 뭉개지니 세상이 한결 부드럽게 보인다. 뾰족했던 갈등도, 날 선 비난도 둥글게 보인다. 이것이 노화라면 나는 기꺼이 이 흐릿함을 받아들이겠다. 가까운 것을 잃은 대신 나는 여백을 얻었으니까. 팔을 뻗어 만든 딱 그 거리만큼 내 삶의 품도 넓어졌다고 믿는다.
그러니 슬퍼할 이유가 없다. 나는 지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식을 더 넓고 깊게 진화시키는 중이다. 초점을 맞추려 잠시 찡그린 미간의 주름조차 이제는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훈장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