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스물셋, 마흔여섯의 합주
고등학교 때 처음 재즈의 세계에 발을 들었다.
그 자유분방한 리듬은 새롭고 쿨해 보였다. 미국 문화에 흠뻑 젖고 싶었던 내 허영심을 자극했다. 또래들과 달라 보이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진짜 붙잡은 건 재즈가 가진 고유의 온도였다. 낯선 유학 생활. 적응하려 애쓰며 요동치던 내 소란한 마음을 재즈는 묵직하게 눌러주었다.
친구들이 Usher, R. Kelly와 TLC에 열광할 때 나는 Frank Sinatra와 Chet Baker, Billie Holiday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들의 음악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이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데 깊었다. 단순하지 않은데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 결을 내 손끝으로 만져보고 싶어 클라리넷을 내려놓고 테너 색소폰을 잡았다. 학교 재즈 밴드에서 연주하며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다.
음반으로만 듣던 재즈를 처음 날 것으로 마주한 건 대학생 때였다. 친구들과 뉴욕 여행을 갔었다. 모두가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간판을 좇을 때 나는 혼자 Greenwich Village로 향했다. 1935년부터 한 자리를 지켜온 뉴욕 재즈의 성지, Village Vanguard.
그 좁고 붉은 공간에서 나는 비로소 재즈의 본질을 몸으로 느꼈다. 그곳에는 무대와 객석을 나누는 선이 없었다. 연주자는 관객의 숨소리를 읽고 관객은 연주자의 땀방울에 화답했다. 박수가 터지면 즉흥 연주가 길어지고 탄성이 새어 나오면 색소폰의 음이 더 높이 치솟았다. 클래식 공연장의 엄숙한 정적 대신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웃음소리가 악기 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소음마저 음악의 일부가 되는걸 느꼈다.
위스키 한 잔과 재즈는 별개가 아니다. 위스키를 입에 머금고 음악을 들이키면 둘이 뒤섞여 뜨겁게 목을 타고 내려간다. 옆자리 사람과 나누는 가벼운 대화조차 리듬을 탄다. 말이 끊기는 지점에서 색소폰이 대신 말을 이어가고, 문장이 마무리될 때면 피아노가 마침표를 찍는다.
재즈에도 룰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규칙은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우아하게 배반하느냐를 위해 존재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보컬이 중심인 듯 하다가도 드럼이 치고 나가면 베이스가 받쳐주고, 피아노가 밀어붙이면 색소폰이 질주한다. 모두가 주인공이면서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음악. 분명 같은 곡인데 매번 다른 곡으로 태어난다. 그날의 공기, 관객의 열기, 연주자의 기분에 따라 템포가 춤을 춘다. 그래서 재즈는 지루할 틈이 없다.
악보라는 지도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을까. 오직 지금이라는 찰나뿐이다. 정해진 형식을 벗어던지는 순간 과거의 실수도 미래의 강박도 힘을 잃는다. 지금 그 순간만이 존재한다. 바로 그때 시간의 마법이 시작된다. 현재에 온전히 몰입할 때 과거가 갑자기 되살아난다. 규칙이 부서진 틈 사이로 기억이 밀려든다. 재즈는 룰을 부숨으로써 시간까지 부순다.
서울에 갈 때면 압구정동의 Once in a Blue Moon을 찾곤 했다. 무대와 객석 사이가 고작 서너 걸음. 마이크를 거치지 않은 현의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던 곳이었다. 코로나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간은 사라졌지만 지난 세월 그곳에서 들었던 재즈의 선율은 내 기억 속에 존재한다.
지난 주말, 홍콩의 Carlyle Club 재즈바를 찾았다. 작년 말부터 라이브 재즈 공연에 대한 갈증이 깊어지던 차였다. 마침 좋은 팀이 홍콩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에 발걸음을 옮겼다.
공연이 무르익고 두 시간쯤 지났을까, 익숙한 "Cheek to Cheek"이 흘러나왔다. 보컬리스트가 첫 소절을 떼자 피아니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코드를 바꿨다. 원곡보다 반음 낮게. 순식간에 공기의 색깔이 바뀌었다. 보컬이 한 손을 살짝 흔들며 미소 짓자 피아니스트는 잠시 멈췄던 손가락을 건반에 다시 내리꽂았다. 객석 어딘가에서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 박제된 채 4시간 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고등학교 기숙사 방의 작은 창문이 떠올랐다. 윙윙거리는 CD플레이어 소리, 그 위로 흐르던 재즈, 그리고 창밖의 가로등 불빛. 그러다 갑자기 뉴욕 Village Vanguard의 붉은 조명 아래로 이동했다. 칵테일 잔을 쥐고 무대를 바라보던 스물셋의 내가 보였다.
장면들이 겹쳐졌다. 열일곱의 나, 스물셋의 나, 그리고 마흔여섯의 내가 같은 선율 위, 나란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은 분명히 홍콩에 있었지만 내 영혼은 쪼개진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세월이 직선으로 흐른다는 건 착각이다. 과거가 뒤에 있고 미래가 앞에 있다고 누가 정했나. 재즈 앞에서 시간은 다르게 움직인다. 둥글게 말려 하나의 점이 된다. 어제의 후회와 오래된 설렘, 그리고 중년의 불안이 한 음계 위에 포개진다.
어쩌면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우리를 음악만이 잠시 풀어줄 수 있으니까.
재즈 바를 나섰다. 홍콩의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귓가에는 여전히 변주된 "Cheek to Cheek"의 멜로디가 맴돌았다. 음악이 멈춘 뒤에도 내 발걸음은 한동안 그 박자를 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