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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Dec 15. 2020

짝사랑은 범죄입니다


시대가 조금씩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건 몇 년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이건 뭔가 아닌데, 갸웃갸웃. 그러던 중 오랜만에 회사에 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름 들으면 아는 방송국. 천 명이 넘는 직원과 그보다 많은 출연자, 견학생, 외국인 관광객들이 상시 찾는 곳. 그런 방송국 건물의 엘리베이터 모니터에 흐르는 회사 캠페인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지하에서 13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문장과 문맥, 단어와 함의 사이에서 허우적댔다.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한 번 이해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기묘한 이야기> 같은 드라마의 한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탈, 씁쓸하면서 조금은 언짢기까지 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상대방 생각에 잠 못 이루고 있는 전 세계 수천만 짝사랑인들을 한 순간에 모두 성희롱 범죄자로 낙인찍어버리다니. 누가 그런 권능을 이들에게 부여했는가.


어쩌다가 이런 공지를 하기에까지 이르렀는지 마음만큼은 충분히 이해한다. 상대가 불편해하는데도 저 좋다면서 귀찮게 따라다니고 찝쩍대며 피해를 주다가 결국 범죄의 영역에까지 이르는 케이스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나는 아직 사랑하는데 헤어지자고 하니 화가 나서 그만…” 따위의 어이없는 변명은 하루 이틀이 멀다 하고 뉴스에 오르내린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죄인가? 사랑하지 말아야 돼?


전두환을 두고 “민주주의의 아버지” 라고 그의 부인은 말했다. 수백수천의 시민을 총칼로 죽인 역사의 범죄자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니 민주주의가 나쁜 거로군. 이명박은 “우린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이라고 했다. 당사자는 물론 측근들까지 너나할 것 없이 온갖 비리와 불법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꼴을 보니 결국 도덕이 잘못된 거네. “법과 원칙에 따라서 수사하겠다”는 검찰이 자기들 치부는 덮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만 쥐 잡듯이 터는 걸 보니 법과 원칙이 문제네 법을 없앱시다. 싫다는 동기 여학생을 따라다니고 행패 부리다 붙잡힌 남자가 “사랑해서 그랬어요. 짝사랑했거든요” 라고 말하는 걸 보니 사랑이 문제로구나. 앞으로 짝사랑은 성희롱이고 불법이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사랑에 잘못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놈이 범죄자인 거잖아. 생활고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가정주부가 아이들을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엄마는 살인자입니다' 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이렇게 극심한 확증편향과 일반화의 오류가 어디 있어.


짝사랑인데 상대가 싫다고 하면 그건 성희롱이 아니라 그냥 거절당한 거다. 우리는 모두 거절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게 두 사람 간의 감정 조율이 완료되어 ‘이제부터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입니다’ 라는 상호 합의가 끝나기 전에는 무조건 일방향인 짝사랑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이런 형태의 사랑까지는 괜찮고 저런 양상의 사랑부터는 범죄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가.


사랑하라. 멋대로 사랑하라. 상대가 싫다고 할 때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거다. 그러다 거절당하면 가슴 아파하고 질질 울면서 그 상처 고스란히 받아들이면 된다. 다들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러니 주제넘게 타인에게 사랑하지 말라느니 어쩌니 운운하지 말라. 이 시간에도 짝사랑에 마음 타들어가고 있을 전국의 남녀노소를 대표해서 항의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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