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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

Ray & Monica's [en route]_291

by motif

마야인에게 부모와 자식, 조상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연결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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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강민지


#1


우리 부부가 과테말라에 온 이후로 4개월째이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는 입에 밴 말이 있습니다. "어찌 이리도 정이 많을까!"라는 감탄사입니다.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매 순간 이 나라 사람들의 양보와 배려의 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청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상황을 짐작하고 스스로 내미는 자발적 환대의 손길입니다. 이분들의 정이 넘치는 마음은 단언컨대 천성입니다.


마야 원주민들의 가족애와 조상을 섬기는 마음도 우리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망자의 날'에는 산소를 방문해 주변을 청소하고 꽃을 올리고 온 가족이 하루를 망자와 함께 보냅니다.


마야인들은 자신의 삶을 안내하고 보호하며 영향을 미치는 영적 실체인 '나우알(Nahual)'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 나우알은 '촐킨(Tzolk'in, 신성한 달력)'이라는 마야 달력의 생년월일에 의해 결정됩니다.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고유한 자신의 특성인 '나우알'에 동행하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운명의 동행자 관계입니다. 이렇듯 마야인들에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서로의 운명에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마야인의 영적 지도자(Mayan spiritual guide)로서 마야 달력을 해석해 개인의 나우알을 알려주고 치유와 영적 조언을 제공하는 사람을 '아흐키(ajq'ij)'라고 합니다. 이 개념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마야 신부(Mayan priest)' 혹은 '샤먼(shaman)'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옳은 번역이 아니므로 마야 키체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날을 헤아리는 사람(counter of days)'의 뜻을 담은 'Daykeeper', 혹은 'Timekeeper'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우주와 자연의 리듬을 해석하는 신성한 마야 달력의 수호자'라는 의미가 좀 더 강화되었죠.


이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면서 개인의 문제에 대한 치유를 담당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조상의 지혜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이처럼 마야인들에게 부모와 자식, 조상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연결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 번 설에는 자신과 부모님, 그리고 조상님들과의 숭고하고 존엄한 관계를 음미해 보는 시간이 되어도 좋을 듯싶습니다.


#2


설명절이 다가오니 마음이 자꾸 한국을 향합니다.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넘는 경지'를 향해 한국을 떠나고 두 번째 설날을 맞습니다만 그 경지는 도대체 어디쯤 있는지 요원하기만 합니다.


설 차례를 모시는 일은 여동생에게, 고향의 산소와 어른들을 찾아뵙는 일은 자식들에게 맡기고 '그곳'이 아닌 '이곳'에만 집중하려 하지만 명절이 다가오면 자꾸 대처에 나간 일가가 모두 부모님 계신 고향으로 모였던 그 추억에 머물게 됩니다.


살붙이로서 자식과 부모 도리를 못하는 객지의 처지에 집착하다 보면 그동안 애쓴 수행이 한순간 거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순례자에게 가장 큰 벽은 '향수'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치치카스테낭고와 아티틀란 호수의 여러 마야 마을들을 순례하면서 마야 문화 연구자로부터 마야의 '신성한 달력'과 '나우얼'에 대해 배우고 여러 '아흐키'들을 만나 그들이 의식에 함께하면서 새삼스럽게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감사와 자식에 대한 의무를 되새기게 됩니다.


마야인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보고 배우면서 향수는 수행의 적이 아니라 화목의 징검다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돌이켜보니 부모님은 자식들의 나우얼에 동행하느라 스스로의 편안함은 도모해 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각자의 나우얼대로 살 수 있는 도구를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 희생의 결과로 얻은 날개로 작년에는 멕시코의 사막에서 새해를 맞았고 올해는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로 회귀한 듯한 과테말라 안티구아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이렇듯 불효로 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부모님에게 그래도 자랑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농부인 부모님이 그래왔던 것처럼, 땅을 가장 값진 보물로 여기고 하늘을 가장 숭엄하게 섬기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바로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것이 나이고 내가 그것'인 가르침대로 세상을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제는 밀려오는 향수를 안고 겨레붙이라도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과테말라 시티의 한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채송화반, 민들레반, 진달레반... 꽃 이름을 딴 학년별 교실에서 한글을 익히고 있는 190여 명의 교포 청소년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선생님들과 우리말로 긴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치 고향을 방문한듯한 효험이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과 함께 짜장면과 짬뽕 한 그릇씩 비우고 나니 고향의 한 밥상에서 떡국을 먹은 것처럼 가슴 벅찼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시간, 귀성길에 오르셨거나 부모님들께서 대처의 자식들을 찾아가는 역귀성길 위에 계시리라. 마음은 이미 가족과 재회했을 길 위의 시간, 며칠간 함께하실 그 소중한 시간들이 모두 웃음 가득한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지시길 소원합니다.


새해 평강하시길!


_ 과테말라 안티구아에서 강민지.이안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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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참석하지 못한 아들 내외의 소박한 결혼식


아들이 우리가 가지 못하는 고향으로 가면서,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지난해의 결혼식 영상을 편집해 보내주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적적할 부모의 설명절을 염려한 아들의 마음씀이었다. 덕분에 가슴 벅찬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https://youtu.be/SF5eEXi3PDE


●이영대·김효정

-일시 | 2024년 8월 31일 오후 5시 30분

-장소 | 모티프원(헤이리예술마을)


●24시간 동안의 결혼식

https://blog.naver.com/motif_1/22356873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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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한밤중 전화, "오늘 프러포즈했어요!"


2024.04.12.일, 봄날의 기록


https://youtu.be/Uu6fVbtkua0


우리 부부가 나라밖 10년 수행을 결행한지 1년이 넘었을 때인 2024년 4월, 우리는 멕시코 본토와 코르테스해를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는, 사막건조지역인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약 1,300 km의 종주를 마치고 반도의 남쪽 멕시코 라파스에서 잠시 정주하는 시간을 가질 때였다.


현지시간 늦은 밤, 아들로부터 영상 전화가 왔다. 낡은 숙소에서 무방비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저 오늘 효정이에게 프러포즈했어요!"


예상하지 못한 한밤중의 혁명적인 소식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영대*효정'의 결정을 축하했다.


"그래 잘했다. 안해본 것은 무조건 해보아야해! 해보고 아니면 파기하면 되지!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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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결혼식, 미국의 한 캠프그라운드에서 전해 온 부모님의 편지


아들 내외의 작은 결혼식, 우리 부부는 우리에게 할애된 2명의 자리를 다른 분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2024년 8월 31일 새벽 4시 30분(오후 5시 30분), 우리가 머물고 있던 미국 뉴욕주 쿠퍼스타운 캠프그라운드의 텐트 속에서 휴대폰 랜턴으로 불을 밝히고 휴대전화 영상통화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아래는 통신 불안정을 염두에 두고 저희의 두 딸에게 대독을 부탁했던 '아들 영대에게, 그리고 새롭게 우리의 딸이 된 효정에게 전하는 나와 아내의 메시지'이다.


https://youtu.be/mlqW2_Bo_Ms


●아버지가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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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너의 세상 첫울음소리를 기억한다.

치한으로부터 누나를 지켜준 중학생 네 용기를 기억한다.


하늘이 유난히 맑은 날, 하늘을 좀 올려다보라, 고 보내준 메시지를 기억한다.

친구에게 슛을 넣도록 어시스트한 것에 더 기뻐하던 날을 기억한다.


훈련에 뒤쳐지는 동료를 네 짝으로 삼아 함께 뛴 신병훈련소의 날들을 기억한다.


할아버지를 업어준 날을 기억한다.

아버지에게 술을 사준 날을 기억한다.

엄마를 안아준 날을 기억한다.


영국에서의 긴 외로움을 기억한다.

칸영화제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그 외로움이었음을 기억한다.


나는 묵묵히 하늘과 땅을 섬기는 농부, 아버지를 가슴속에 걸어두고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오늘 너무나 행복하게도

다시 각오를 새롭게 한다.


내 아들 같은 사람이 되기를...


2024년 8월 31일

_행복한 아들의 결혼식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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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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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정아!


효정이를 어떻게 부를지를 고민했었다. ‘며늘아기’라고 불러도 보았다만 어쩐지 내게는 거리감이 느껴지는구나.


나는 너를 딸로 생각하니 우선은 '나리', '주리'처럼 '효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너를 진실로 사랑하는 내 마음이 담긴 것 같구나.


두어 달 전 멕시코에서 사돈어른, 사부인과 영상통화로 인사를 나눈 뒤부터는 불쑥 눈물이 나곤 한단다.


감사하게도 우리 부부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 기꺼이 양해를 해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감정은 혼례의 현장에서 너와 아들을 안아주지 못한다는 것이 흡족하지 않은 것 같구나.


남편과 내가 '10년 세상순례 수행'에 뜻을 세우고 나라밖으로 나온 그 결행을 일관되게 이어가는 것이 우리에게도, 너희들에게도 혼인에 참석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 '세운 뜻'의 일관된 실천의 단호함보다 그 현장에서 너희를 안을 수 있는 따뜻함으로 기우는 구나.


우리 부부가 살아온 방식이 형식에 연연하거나 명분을 세우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남편 몰래 눈물을 훔치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영대를 통해 '익사이팅한 탐험가로 살아온 엄마ᐧ아빠만큼이나 효정이 또한 모험가'라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다.


사실 '결혼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미답지'란다. 그러니 가장 매력적인 모험의 영역인 셈이다.


우리는 45년간의 동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일이 미답지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를 탐험중이기도 하지만 결혼을 탐험중이기도하다.


효정아!


너는 오늘부터 나의 동료이다.


우리 함께 서로의 모험을 격려하며 미답지의 탐험 경험을 나누자구나!


지금 우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머물며 자연과 자급자족의 삶을 경험했던 월든 호수를 지척에 두고 있다.


이어서 우리 삶의 생활주기에 지침이 되었던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가 말년 30년을 보낸 Good life center로 갈 것이다.


세상의 위대한 스승을 만나는 일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


효정이와 영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스승 삼고 현상들에 궁금해 하며 그 궁금증을 푸는 일로 네 모든 삶을 관통하면 좋겠구나.


사랑한다. 효정아!


우리가 어디에 있건 너희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2024년 8월 31일


_나의 포옹을 이 편지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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