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 보여준 ‘합리화의 미학’
감독: 박찬욱
주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장르: 스릴러, 코미디, 블랙코미디
국가: 대한민국
러닝타임: 139분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 아내 ‘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만수는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목이 잘려 나가는 듯한 충격에 괴로워하던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면접장을 전전하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무작정 [문 제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이력서를 내밀지만, ‘선출’(박희순) 반장 앞에서 굴욕만 당한다. [문 제지]의 자리는 누구보다 자신이 제격이라고 확신한 만수는 모종의 결심을 한다.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취업에 성공하겠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문장이 있었다. “어쩔 수가 없다” 너무 흔하게 쓰지만, 그만큼 많은 의미를 담은 말.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는 이 짧은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자기 합리화 그리고 그 이면의 두려움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처럼 포장된 선택들, 그 안에 감춰진 욕망과 생존 본능을 차갑게 보여준다.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영화 내내 만수가 되뇌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만수가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회사로부터 똑같이 들은 말이다. 만수는 실직 후 심리상담센터에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마주 앉아, “실직은 내 탓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되뇐다. 이 장면은 집단적 위로의 형식을 띠지만 실상은 ‘책임의 전가’를 연습하는 의례처럼 보인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통해 도덕적 면죄부가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방식을 드러낸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음”을 중얼대며 살아가는 순간들을 떠올렸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단, 구조를 탓하고 상황을 탓하고, 타인을 탓하는 익숙한 습관 말이다.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살아
그의 말은 잔인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논리적이다. 그 논리의 이름은 바로 ‘생존’이다. 사회라는 경쟁 구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야 한다는 믿음을 갖는다. 박찬욱은 이 장면에서 폭력을 비정상적 행위가 아닌 정상적 시스템의 결과물로 그린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 말은 이제 변명이라기보다, 하나의 사회적 공식이 된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의 논리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노동 후의 위스키 한잔,
이 맛에 삽니다
선출은 만수의 직접적 경쟁자가 아니다. 그러나 만수는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 지점이 흥미롭다. 객관적 위협이 사라지고 나면, 인간은 스스로 위협을 만들어낸다. 존재 그 자체가 불안의 대상이 되는 순간, 폭력은 자위(自衛)에서 자발(自發)로 바뀐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통해 ‘어쩔 수 없음’이 어떻게 자기기만의 언어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우리 안에 자리한 경쟁 본능의 비합리성을 떠올렸다. 더 이상 ‘생존’이 목적이 아닌데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을 경계하고, 밀어내며,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인간의 폭력성일지도 모른다.
다 이뤘다
마지막 장면에서 만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가족들과 마당에 앉아 있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집’을 결국 지켜낸 셈이다. 그러나 그 평온은 공포보다 더 섬뜩하다. 그의 표정에는 후회도, 두려움도 없다. 폭력은 일상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었고 윤리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통해 ‘도덕적 무감각’을 시각적으로 완성한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낸 적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 방식이 물리적이지 않았을 뿐,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선출’과 ‘범모’를 지워왔던 것은 아닐까.
〈어쩔 수가 없다는〉단순한 범죄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합리화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도 악하지 않지만 모두가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 박찬욱은 그 진실을, 피가 아닌 침묵과 평온으로 그려낸다. 이 영화가 두렵게 다가오는 이유는, 만수가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너무나 보통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가장 세련된 방식이 아닐까. 그리고 박찬욱은 그 거짓말의 얼굴을 누구보다 정직하게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