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프럼 어스>

영생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by motifnote


작품 정보

감독: 리처드 쉔크만

주연: 데이빗 리 스미스, 존 빌링슬리, 엘렌 크로포드, 윌리엄 캇, 애니카 피터슨, 리차드 리엘

장르: 드라마

국가: 미국

러닝타임: 87분


줄거리

10년간 지방의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중에 종신교수직도 거절하고 돌연 이사를 가려는 존 올드맨은 그의 행동에 의심을 품고 집요하게 추궁하는 동료들이 마련한 환송회에서 갑자기 폭탄선언을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자신이 14,000년 전부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 그는 매번 10년마다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에 다른 신분으로 바꿔 이주해 왔고 이곳에서도 10년을 채웠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그동안 이동하면서 역사 속 많은 인물들과 사건에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각 분야 전문가인 동료 교수들은 그의 주장에 점차 신빙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급기야 그가 자신이 부처의 가르침을 중동에 전하려다 본의 아니게 예수가 되어버렸다고 하자 존의 주장에 수긍해 주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동료의 분노를 사버린다. 동료 모두들 괴로워하자 그런 동료를 위해 존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얘기가 다 거짓말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료들이 다 떠나고 나서 그의 주장에 대한 놀라운 진실이 밝혀지는데...




이 영화는 예전부터 남자친구가 추천해 줬던 영화인데, 처음 추천을 받았을 때는 솔직히 “꼭 봐야겠다"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어떤 내용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고, 흔히 떠올리는 화려한 SF 영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계속해서 강하게 추천을 하기도 했고, 결국 함께 보게 되었다.


영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첫인상은 꽤 신선했다. 일반적인 영화처럼 사건이 전개되고 장면이 바뀌는 구조가 아니라, 마치 친구들끼리 한 공간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마치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주인공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는 듯한 생생함이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본다’기보다는 ‘듣는다’에 더 가까운 경험으로 다가왔다.




끝나지 않는 삶은 행복일까

<The Man from Earth>의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단 하나다. 주인공이 무려 14,000년을 살아온 인간이라는 점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 설정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는 영생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단순히 늙지 않는 존재일까. 영화는 끝까지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14,00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단순히 ‘늙지 않는다’는 개념보다는 ‘죽지 않는다’는 쪽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고와 위험이 있었을 텐데, 그 모든 순간을 넘어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결국 영생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영생하는 삶은 좋은 삶일까.


인간은 오래전부터 영생을 꿈꿔왔다.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삶은 어쩌면 인간이 가장 원초적으로 욕망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도 그런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불로초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만큼 인간은 ‘끝나지 않는 삶’을 갈망해 왔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만약 정말로 끝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 아니면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형태의 삶일까. 영화 속 주인공은 14,0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떠나보냈을 것이다.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같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 결국 정이 깊어지기 전에 떠나야 하고, 혹은 상대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 이 지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관계는 왜 끝이 있을 때 더 깊어질까

우리는 보통 ‘영원한 관계’를 꿈꾸지만, 정작 그 영원이 현실이 된다면 그 관계는 유지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주인공 역시 그런 선택을 반복한다. 누군가와 깊어지기 전에 스스로 관계를 끊고 떠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계속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지금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 관계에 ‘끝’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이 관계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지금처럼 간절하게 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있을 때 잘하자”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언젠가는 그 ‘있음’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지점을 아주 조용하게 건드린다.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개념은 서로 대비되는 요소를 통해 의미를 갖는다.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이 존재하고, 기쁨이 있기 때문에 슬픔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삶은 어떨까. 삶이라는 개념은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에 더 선명해지는 것이 아닐까. 만약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을까. 언제든지 이어질 수 있는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의 가치는 오히려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리고 결국 하나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소중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죽음은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았던 감정은 ‘부러움’이 아니라 ‘조금의 두려움’이었다.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나는 삶이기 때문에 지금의 순간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거창한 사건 없이도 깊은 생각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영생이라는 설정을 통해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끝이 없는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끝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순간이 더 소중해진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애틋해지고, 더 진심을 담게 된다. 죽음은 두려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삶의 의미를 만들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을 더 치열하게 살아가게 된다. 이 영화는 조용하지만 강하게 삶의 본질을 건드린다. 그리고 결국,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