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왜 박찬욱은 사랑을 ‘결심’이라 말했을까?

by motifnote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2022)> 포스터


작품 정보

감독: 박찬욱

주연: 박해일, 탕웨이

장르: 멜로, 미스터리

국가: 대한민국

러닝타임: 138분



줄거리

산에서 떨어져 사망한 남성의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해준은 남겨진 아내 서래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증거와 의심 사이, 욕망과 윤리 사이에서 흔들리던 해준은 결국 서래를 놓아주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끝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 그리고 마지막 바다… 해준은 끝내 서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과 죄책감의 파도 속에 잠긴다.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해준이 밤마다 서래의 집 앞에 서성이고, 그녀의 호흡을 들으며 잠드는 장면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선다. 그의 시선은 수사관의 관찰이지만, 마음은 이미 경계를 넘어선 상태다.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려 하지만 어느 순간 ‘이해’라는 이름으로 그의 삶에 조용히 침투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예전에 누군가를 좋아했던 내 모습을 떠올린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모든 것이 선명하고 안전했지만,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가려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혹시 내 관심이 그 사람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혹은 선을 넘는 건 아닐까. 애써 조심스럽게 바라보면서도 끌리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던 시간들. 해준처럼, 나도 ‘관찰과 침범’의 경계에서 오래 서성였던 적이 있다. 사랑은 그 경계에서 시작되지만, 동시에 그 경계에서 흔들린다는 것을 이 장면이 또렷하게 상기시켜 준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질 형사가 품위 있어서.

서래의 말은, 정확한 의미를 찾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말이다. 고백 같고, 이별 같고, 설렘 같지만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사람의 감정에는 번역되지 않는 언어가 있고, 서래는 그 언어로 이야기한다. 서래의 모호함에 흔들리는 해준을 보며, “정확하지 않은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동시에 아름다운지 알게 된다. 사랑은 때로 설명할 수 없는 말 한 줄로 더 깊어지고, 더 무너진다.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도 그랬다. 감정이 도무지 해석되지 않던 사람. 고맙다는 말에 슬픔이 섞여 있고, 괜찮다는 말에 포기가 담겨 있고, 사랑한다는 말에 불안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를 잃어버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바다가 좋아요.

산을 좋아하는 해준과 바다를 닮은 서래. 둘은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결국 성질이 다른 두 자연처럼 끝내 한 지점에 머물지 못한다. 산은 변하지 않지만, 바다는 늘 흐르고 흔들린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 둘의 충돌과 같다. ‘서로를 사랑했어도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하면 함께 갈 수 없다.’ 영화는 그 사실을 산과 바다라는 이미지로 잔인할 만큼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며 깨닫는다. 사랑이란 때로,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방향’을 이해하는 문제라는 걸.


나 또한 누군가와 방향이 다른 사랑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끊임없는 변화를 꿈꿨고, 그는 안정과 일상을 좋아했다. 한 사람은 산처럼 버티고 싶어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바다처럼 어디론가 흐르고 싶어 했다. 많이 좋아했지만, 원하는 미래가 완전히 달랐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

서래의 마지막 말은 해준에게 남기는 고백이 아니라, 그를 위한 결심이다. 그녀는 사라짐으로써 해준을 지킨다. 사랑은 끝까지 함께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 서로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떠나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서래는 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오래 머물렀다. 너무 사랑했기에 떠나야 했던 관계가 있었다. 함께 있는 것이 서로를 더 아프게 만든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멀어진 적도 있다. 해준처럼 붙잡고 싶었고, 서래처럼 떠나야만 했다. 영화는 그 잔인한 순간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사랑의 끝은 이해가 아니라 결심이라는 것을.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영화다. 누군가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마지막 장면을 끝내 해석하지 못해도, 사랑은 우리를 조금씩 바꾼다. 이 영화는 그 불완전함을 부끄러움이 아닌 ‘성장’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산과 바다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나만의 온도’를 찾아가는 일. 그리고 그 온도를 찾아가는 과정 전체가, 사랑이고, 결심이고, 삶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