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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운틴구구 Oct 18. 2021

계량컵 애호가의 고백

500mL 계량컵을 애용한다. 라면 끓일 물을 정량으로 넣을 땐 계량컵으로, 드립백 커피를 내려 마실 땐 저그로, 레몬청과 탄산수를 섞어 레모네이드를 양껏 마실 땐 유리잔으로. 전기 포트로 끓인 물을 담아 한약 파우치를 데울 때와 갈비찜 양념을 만들 때도 쓰고, 심지어 화분에 물을 줄 때도 물조리개 대용으로 쓴다.


결혼 전부터 갖고 있던 계량컵은 마지막 직장인 라이프스타일 숍에서 구매한 제품이었다. ‘트렌드글라스 제나(Trendglas JENA)’라는 유리 전문 브랜드에서 제작한 것으로, 단아한 디자인과 내열유리 소재가 특징이다. 신혼생활을 하며 전보다 꾸준히 사용했더니 하루는 유리 표면에 실금이 생겼다. ‘내구성과 내열성이 일반 유리보다 네 배나 강하다고 해도 자주 쓰고 마구 쓰는 주인을 만나면 몇 달을 못 버티는구나.’ 그래도 믿기지 않아 실금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며칠을 방치하다 쓰레기 분리수거장으로 보내주었다.


제나 계량컵은 2만 원대. 타 브랜드 제품과 비교하여 디자인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원통형에 정확히 반원을 그리는 손잡이, 그리고 쨍한 레드나 블랙이 아닌, 여리여리한 블루의 눈금이 좋았다) 한두 달마다 한 번씩 새로 사야 한다면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다. 적절한 대용품을 찾지 못해 구매를 미루던 차, 주말에 남편과 집 근처 이케아에 들렀다가 3,900원짜리 계량컵을 발견했다. 내열유리에, 두께는 제나 계량컵보다 조금 두꺼웠으나 생김새는 흡사했다. 굵고 진하게 새겨진 검은 눈금이 눈에 거슬렸지만 제나 계량컵 하나 값으로 이케아 계량컵 여섯 개를 살 수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또 깨뜨릴 걸 대비하여 두 개를 샀는데도 3개월을 버티지 못해 다음번엔 세 개를 샀다. 계량컵 세 개로 반년을 버텼던가? 이번에는 남편 혼자 이케아에 갔는데 계량컵은 품절이었단다. 남편은 이케아 계량컵과 비슷한 가격대의 타 브랜드 제품을 인터넷으로 찾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케아 제품보다 유리 두께가 두껍고, 바닥에서 위로 갈수록 지름이 넓어지는 형태에, 둔중하고 투박한 손잡이가 삐죽 붙어있었다. 눈금색은 빨강.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했지만 속으로는 제나와 이케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계량컵 없이 한 주, 두 주, 버텨보니 라면 끓일 때와 화분에 물 줄 때가 가장 불편했다. 라면은 무조건 물 양을 정확히 맞춰야 맛있다는 신념이 있다. 몇 번 눈대중으로 물을 계량했다가 밍밍한 맛에 실망하고선 500mL 생수 페트병을 계량컵으로 써보기도 했다. 그래도 약간의 오차가 아쉽다고 하면 지나치게 까다로운 걸까. 혀가 늘 먹던 염분 농도에 익숙해져서 조금이라도 더 짜거나 덜 짜면 이건 아니야, 하고 불만을 표하는 건지도 몰랐다. 식물 물 주기도 마찬가지. 한결같이 쓰던 도구에 몸이 적응한 모양인지, 주둥이가 없는 컵으로 물을 들이붓듯 주니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요리를 잘하거나 성격이 빈틈없어서 계량컵을 애용하는 것은 아니다. 계량컵 하나만 있으면 대여섯 가지 용도로 쓸 정도로 간편하기 때문에, 더욱이 내가 고른 계량컵은 가벼운 데다 보기에도 기분 좋은 디자인이라, 애착을 갖고 자주 쓰다 보니 어느새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본디 쓸모가 많은 도구인데 디자인까지 아름다우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손이 더 많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으니 이케아 계량컵보다는 제나 계량컵 쪽으로 잠시 마음이 기울었다. 나에게 계량컵이란 이미 계량컵 이상으로 의미 있는 살림 도구인데, 깨질 때 깨지더라도 돈 좀 쓰면 어때, 하고 배짱을 부리고도 싶었다.


결정 장애로 우물쭈물하는 사이, 대형마트에 간 남편이 마트에서 판매하는 계량컵을 덜컥 사 오고 말았다. 무겁고, 투박하고, 새빨간 눈금이 또렷하게 찍혀있어(“나는 계량컵이오!” 하고 외치는 듯하다) 도무지 정이 안 가는 제품으로. 난감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속상하긴 해도 생활에 사사로운 부분이라면, 특히나 이미 벌어진 일에 관해서는 불만을 갖기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러고 보면 혼자 살 때와는 달리, 남편과 둘이 살 때의 나는 생활의 많은 부분들을 양보하거나 내려놓고 산다. 용납하고 싶지 않은 취향과 예상치 못한 변수 들에 대해서도 날 세우지 않고 초연할 수 있는 건 어쩌면 게으른 주부만이 가질 수 있는 너그러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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