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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 Aug 10. 2021

명예를 지킬 것인가, 욕망을 따를 것인가

영화 <그린 라이트> 속 이중적 이미지


가장 용맹한 자, 나의 목을 내리치면 명예와 제물을 주겠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기묘한 형상을 띤 녹색의 기사가 나타나 달콤한 제안을 한다. 단, 1년 뒤 녹색 예배당에 찾아와 똑같이 도끼날에 목을 내놓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훗날의 목숨이 걸린 이 위험한 ‘크리스마스 게임’에 기사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아직껏 자신만의 무용담이 없었던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이 순순히 제안에 응하게 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명예와 제물을 얻은 그가 녹색 예배당을 찾아야 할 순간이 오고야 만다. 영화 <그린 나이트>는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가웨인의 여정으로부터 본격적인 막을 연다.



14세기 중세 영국 문학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를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 <그린 나이트>는 녹색 기사만큼이나 모호하고 기묘함으로 가득 찬 가웨인(데브 파텔)의 여정을 따라가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영화는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본래 가웨인의 이모로 그려졌던 ‘모건 르 페이’를 어머니로 등장시킨다든가 가웨인의 여정에 여우를 출현시키는 등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를 불어넣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가장 큰 변주라고 한다면 원작 속 원탁의 기사들 사이에서 기사도의 모범으로 꼽히는 가웨인이 기사도 정신을 시험하는 다섯 개의 관문을 거치며 영화에서 줄곧 명예와 기사도적 덕목에 반하는 인물로 나온다는 점이다.


녹색 기사와의 첫 대면에서부터 모종의 두려움을 내비친 그의 모습을 미루어볼 때 영화에서 가웨인은 기사도 정신에 따라 움직인다기보다 기사로서의 영예로운 칭호를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로 보인다. 오직 명예라는 껍데기만을 바라고 제안에 응한 그가 고작 1년이 지났다고 하여 진정한 기사로 거듭났을 리는 만무하다. 가웨인은 여정을 떠나기 전에도, 떠나는 중에도 여전히 껍데기 기사에 불과할 뿐이다.


스스로 진정 원해서가 아닌, 단지 기사라면 으레 지니고 있어야 할 ‘자신만의 모험담’을 하루빨리 마련하고 나아가 아서왕의 혈육으로서 그에 걸맞은 명성을 거두기 위해 움직인 그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이 위태로운 여정에서 생존을 갈구하고,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며 기사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가웨인은 전쟁에서 두 형제를 잃었다는 이의 말을 듣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으며(연민) 그가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길을 일러줬음에도 일말의 관대함조차 보이지 않는다. 전쟁터를 떠돌던 스캐빈저가 아량을 베풀지 않는 가웨인에게 그 즉시 정보의 대가를 요구하는 행위는, 이후 가웨인이 성 위니프레드를 만났을 때 그의 머리를 찾아주는 대가로서 무언가를 요구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마치 오래전 누군가에게 머리를 잘린 위니프레드의 애통한 피를 연상시키 듯 붉은 물로 가득한 호수 속에서 결국 잃어버린 머리를 되찾아준 가웨인은 다음날 잃어버린 도끼를 다시 손안에 넣게 된다. 이후에도 영화는 줄곧 인물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고, 대상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연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추측컨대 '무언가를 얻으면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일종의 교환 법칙이 세계관 내에서 게임을 관장하는 기본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도적에게 빼앗겼던 도끼가 가웨인에게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게임의 대가를 치르러 가는 가웨인의 여정 자체가 거대한 게임판에 의해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 녹색의 기사를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으로 보냈던 가웨인의 어머니 ‘모건 르 페이’는 한편으로 이 모든 게임판을 주관하는 주술사로서 가웨인을 계속해서 시험에 빠뜨리고, 지켜본다.


가웨인의 어머니가 어떠한 연유로 아들을 게임판에 들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확실한 건 그가 가웨인의 여정 내내 모든 것을 관망하는 관찰자 역할을 행한다는 것이다. 줄곧 여우의 모습으로 함께하던 그의 어머니는 가웨인이 성주의 성에 다다르자 이내 종적을 감추더니 성 내부에서 눈을 가린 노파의 모습으로 등장해 가웨인이 귀부인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그를 근방에서 지켜본다.     


원작에서, 녹색의 기사가 자신이 사실은 획득물 교환 게임을 제안한 성주이며 귀부인을 시켜 그(가웨인)를 유혹하라고 이끈 장본인이었음을 실토하는 대목을 미루어볼 때 녹색 기사 역시도 모건 르 페이와 함께 가웨인의 여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이로 등장함을 추측해볼 수 있다.


한편으로 여우는 가웨인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동시에 여정 내내 함께한다는 점, 가웨인이 성 위니프레드의 집이나 성주의 성채와 같이 안전한 곳에 당도할 때마다 사라진다는 점, 성주와의 만남의 끝에서 가웨인이 ‘우리’를 놓아달라고 한 점, 그리고 거인의 앞에서 한껏 움츠러든 가웨인을 대신해 앞장서 울부짖는다는 점, 마지막으로 가웨인이 녹색 예배당에 다다르기 전 그에게 최종 경고를 날린다는 점에서 가웨인의 심적 두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존재이자 그의 소극적인 내면을 대신하여 표출하는 이중적 존재로서 보이기도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앞서 가웨인은 명예와 기사 작위를 얻기 위해 녹색 기사의 제안에 순순히 응했다고 했다. 명예와 부를 맛본 가웨인이 1년 뒤에 게임을 그만두지 않고 죽음이 도사리는 녹색 예배당으로 스스로 향한 것은, 결국 그가 명예를 지니는 것만큼이나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리라.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기 위해 죽음과 명예의 길을 택하지만, 가웨인은 죽음을 끔찍이 두려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게임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말의 생존 본능은 가웨인의 뒤꽁무니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가 첫 관문으로 도적단을 만났을 때도 연신 목숨을 갈구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게 한다.


도적단에 의해 밧줄로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영화는 360도 패닝 숏을 통해 가웨인이 맞이할 미래의 모습을 해골로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가웨인의 상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장면에서 녹색 대지를 배경으로 나무 앞에 달랑 놓인 고독한 해골의 모습은 가웨인이 처음 스캐빈저를 만날 때 그 뒷배경으로 전쟁터에서 죽어 나간 이름 모를 이들의 형상과도 겹쳐 보인다. 그렇다면 가웨인이 죽음을 향한 여정에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거부하는 행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다시금 명예로운 삶과 죽음의 개념으로 회귀 된다. 가웨인은 죽음의 선택지에서조차도 ‘자연에 순응하는 죽음’이 아닌 ‘명예로운 죽음’을 추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듭 녹색(자연)을 거부하고 붉은색(욕망)을 뒤따른다.


세상이 명명한 기사도 정신과 명예를 이상으로 좇는 가웨인의 허울뿐인 신념은 그가 지니고 다니는 녹색 허리띠가 여정 중에 재차 빼앗기고 등장할 때마다 매섭게 부정된다. 원작에서 가웨인은 녹색 띠를 수치의 징표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그는 도적단을 마주했을 때 연신 “I’m not a knight”라고 외치며 목숨을 구걸한다. 도적단이 빼앗아간 녹색 허리띠는 가웨인이 귀부인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별안간 모습을 드러내며, 최종적으로 가웨인은 성주와의 획득물 교환 게임에서 성을 머무는 동안 얻은 녹색 띠를 넘기지 않음으로써 성주와의 신의를 저버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에서 녹색 띠가 한낱 수치와 실패의 상징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웨인은 결말 부 360도 패닝 숏을 통해 다시 한번 죽음의 순간을 상상 속으로 목도 함으로써 가까스로 얻어낸 최고의 명예가 얼마나 허상 되었음을, 나아가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가를 돌연 깨닫게 된다. 이로써 녹색의 기사 앞에서 녹색 띠를 풀어헤치고 순순히 목을 내놓는 가웨인의 모습은 그가 수치의 가운을 벗어 던지는 행위이자 그간 여정에서 저버렸던 용기, 신의, 염치, 명예 따위의 기사도 정신을 이룩한 순간이면서 궁극적으로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고 내적으로 단단히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명예의 허울만을 좇는 인간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작품 속 가웨인을 통해 그려내면서 그 나약한 허영심을 조소하면서도 한편으로 기사도 정신을 온전히 달성하는 것이 당대나 지금이나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가웨인의 여정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욕망의 순간을 매번 억제해야 했던 기사들의 품행에 존경심을 표한다.


영화 <그린 나이트>를 보는 내내 당대의 기사도적 모습과는 거리가 먼 가웨인에게 계속해서 마음이 가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끊임없이 열망하고 바라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명예와 부를 위해 움직이고,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질하며 사사로운 유혹에 넘어가는 가웨인의 행동거지를 보고 있자면 그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그의 한계점이 나의 한계까지인 것 같기도 하여 가웨인이 닥치는 상황에 자연스레 나를 투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린 나이트>의 미학은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전문은 아트인사이트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5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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