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 영화기자
“이런 XX.”
말하려다 심호흡 한 번. 나는 전날 홍보사에 영화 스틸컷을 요청했고, “아직 공개할 만한 스틸이 없다”라는 답변을 받았으며, 바로 다음 날, 정확하게 없다고 말한 그 사진이 첨부된 메일을 받았다. 없다고 한 스틸컷이 밤사이 갑자기 준비된 건 아니었고, 전말은 이랬다. 홍보 담당자가 내가 아니라 다른 잡지사 기자에게 최초 스틸컷을 보내려 했는데 하필 수신인으로 나를 지정해버렸다. 요청한 나한테 보내지 못하며 그분도 내적 갈등이 있었는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한 거다. 바로 따져 묻는 대신 전작의 압도적인 성공으로 차기작에 관심이 몰린 이 감독의 신작 기사를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마감을 하는 게 먼저라고 정신을 수습한다. 매체 첫 공개 스틸이다. 오배송된 스틸 장면의 첨부 여부에 따라 기사의 중요도가 달라질 수 있다. 이른바 ‘독점’과 ‘단독’ 타이틀을 거느냐 마느냐의 순간. 덜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답신을 보냈다.
“보내주신 스틸 잘 받았어요!”
실수로 보낸 그쪽이 차마 “잘못 보냈으니 돌려 달라.” 답신할 요령이 없어지는 결정적 순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다. 나는 매주 같은 주, 같은 날, 같은 시간, 지하철과 버스 가판대에 나란히 걸릴 주간지들이 취재 경쟁을 하며 각축전을 펼치던 영화잡지 춘추전국 시절을 관통했던 영화기자다. 1995년 4월 14일 <씨네21> 창간. 연이은 월간지 <키노>의 탄생. 그 뒤로도 <필름2.0> <무비위크> <씨네버스> 등 지금은 모두 폐간돼 이름을 읊어도 생소해 할 영화잡지들이 앞다퉈 창간하면서 영화잡지, 특히 주간 단위로 발행되는 영화주간지가 융성했던 전설의 시기가 있었다. ‘푸른 바다의 전설’ 같은, 그 전설이다. 최근 강의를 나가거나 30대가 참여하는 영화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이 잡지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는 한 주에 한 번씩 이 많은 신간이 일제히 집 우편함에 도착했답니다.
내 이름을 단 바이라인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씨네21>에 <대부>의 고든 윌리스를 비롯해 <E.T.>를 촬영한 앨런 다비오, <어둠 속의 댄서>의 눈 로비 뮐러 감독 등 할리우드 유명 촬영감독들의 작품 세계를 망라하는 ‘세계의 촬영감독’ 시리즈를 연재하면서부터였다. 내 이름 옆에는 잡지사들이 필자들에게 많이 지칭했던 ‘자유기고가’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해당 잡지사의 정식 소속은 아니지만 당시 범람하던 영화지, 내지 문화지에 꾸준히 글을 쓰며 이름을 알리고 정식 기자가 되기를 바라는 대기 상태랄까. 그렇게 기자 일을 시작한 후 <씨네버스> <무비위크> <필름2.0>을 거쳐 <씨네21>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간 어쩌다 보니 나는 거의 모든 영화잡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자유기고가로 지낸 시간을 빼고도 <씨네21>에서만 13년 근속이니, 다른 잡지 근속 기간은 상대적으로 길지 않은 편이다. 그땐 창간을 많이 한 만큼 경영난으로 폐간도 잦았고, 폐간 즈음의 사내 경영난을 버티다 탈출도 많이 했다. 그렇게 돌아보니 내 경력이 ‘영화잡지 폐간의 역사’로 치환되는데, 어쨌든 그래서 나는 오늘날 후배들에게 ‘영화잡지계의 시조새’라 불리고 있다.
그즈음 지긋한 나이의 어느 일간지 기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영화기자’라는 타이틀이 좀 어불성설 아니냐는 거다. 언론협회 소속도 아닌 데다,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등을 로테이션으로 돌며 전천후 기사를 쓰는 그가 보기에는 영화만 다루는 기자의 영역이 너무 협소해 보였던 것 같다. 수적으로도 한 줌도 안 되던 우리가 그렇게 ‘영화기자’라는 직함을 내걸고 하는 일은 신작 영화를 개봉 전에 보고, 감독, 배우, 스태프를 인터뷰하고, 리뷰를 쓰고, 심층 분석 기획기사와 뉴스를 쓰는 일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나 감독을 만나보면 “아고, 2년이 어떻게 갔는지 몰라요”라고 하는데, 이는 그분들의 신체 리듬이 개발에서 작품 완성까지 몇 년이 걸리는 시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주 단위로 개봉하는 영화에 맞춰 사는 영화잡지 기자들은 2주 후 개봉할 영화를 보고, 고민하고, 기획 아이디어를 만들다 보니 남보다 정확히 2주를 앞서 산다. 처음에는 주간지 기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이 신기해 보였는지, 취재 요청도 몇 번 받았다. 이른바 ‘영화기자의 24시’ 이런 것들. “찍어도 별스럽지 않을 텐데요.” 하고 거절한 경우도 많다. 정말 별스럽지 않다. 그중 영화기자의 하루를 쫓은 TV 다큐멘터리가 있었는데 시사회를 가는 선배 기자에게 “근무시간에 영화를 보러 가다니 정말 좋겠다”라는 질문이 따랐다. 다시보기도 없던 시절, 첫 시사를 보고 마감을 하려 치면 무척 긴장됐다. 기자 시사에서 기자로서 본 영화와 개봉 후 객석에서 관객이 되어 본 영화가 주는 재미는 질적으로 달랐다. 네, 근무시간에 영화를 보는 ‘근무’를 하러 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영화기자는 90년대 한국영화 산업 붐, 비평의 확장으로 새로 난 신종 직군이지 싶다. 지금이야 <기생충>을 비롯해 한국 영화가 세계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윤여정 배우가 ‘한국 배우’로서 이룬 쾌거도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영화를 ‘방화’라는 말로 폄하하던 시절도 있었다. “한국 영화는 극장에서 안 봐요”라는 말은 단순히 취향이나 선호도를 뜻하는 말을 넘어 “저는 한국 영화 같은 퀄리티가 낮은 영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 영화 같은 작품성 높은 영화만 선택해서 보는 식견이 높은 사람입니다”라고 으스대는 맥락의 문장이었다. 한국 대중영화의 작품성이나 완성도가 해외 작품에 못 미치는 데서 인식이 점점 굳혀진 탓도 있다. <키노>와 <씨네21>의 출현은 그 선입견을 바꿀 일대 전환이 된 사건이자, 영화 저널의 출발이기도 했다. 그전에도 영화잡지가 있었지만 <스크린> 같은 대중지는 주로 당시 유행하던 미국 영화, 홍콩 영화의 ‘스타’를 내세우던 잡지였고, 리뷰나 비평을 통한 영화 분석이나 연출자, 배우 등 작품에 대한 인터뷰가 나오는 영화 저널과는 조금 성격이 달랐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서막을 연 <카이에 드 시네마>나 미국의 <버라이어티> <할리우드 리포터>. 영국의 <엠파이어>, 일본의 <키네마 준보>같이 영화 리뷰와 영화 산업의 이슈를 전해줄 저널의 필요성이 서서히 대두되었고, 90년대에 영화잡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영화잡지의 창간을 열망했던 것같이 들리지만, 처음에는 누구도 성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매주 어떻게 영화로만 잡지 한 권을 발행할 콘텐츠를 채워 넣느냐”는 것이 우려 지점이었다. 그런데 웬걸, 언론이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영화와 감독, 배우들이 원석처럼 널려 있었다. 인물 발굴과 심층 기사가 영화와 덕업 일치된 기자들의 열띤 취재로 채워졌다. 먼저 기사화 하는 사람이 임자라고 말할 정도로 발견의 기쁨이 큰 글이 써내려져 갔다. 급기야는 오히려 읽는 독자들이 한 주에 소화하기 숨 가쁘다며 “워워” 할 만큼 잡지 두께도 점점 두꺼워져 갔다.
영화잡지 기자들과 취재원들이 부담 없이 탁 터넣고 작품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하려는 움직임도 이때 형성됐다. 감독과 배우, 프로듀서, 촬영, 미술, 음악, 의상 등 영화계 각 분야의 인물들이 작품을 만들 때 가진 의도와 비하인드 스토리가 활자화 되어 대중에게 전달됐고, 그렇게 모인 글들이 다시 생동하는 한국 영화의 흐름을 분석하는 재료가 되어 또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한 영화를 두고 찬반도 크게 나뉘었다. 각 필자들이 글로 주고받는 ‘싸움’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누군가 영화를 공격하면, 다음 주에 다른 필자가 그 필자를 공격하는 식이었다. 모두가 글로!
기성 감독들뿐만 아니라 신인 감독들을 주목하고,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조연 배우들을 조명했다. 제작자나 프로듀서들이 기자들에게 작품을 함께할 실력 있는 감독과, 역할에 맞는 배우를 추천해 달라고 의견을 구할 때, 전문지 기자라는 자부심도 커져갔던 것 같다. 만드는 이들의 몫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분석하고, 의도를 듣고, 의미를 짚어내고, 가치를 평가하고, 새로운 창작자들을 발굴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이즈음 우리 영화계가 다양한 매체와 함께 교류하며 알게 된 것들이다.
방송처럼 시청률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결과물에 대한 평가도 매주 혹독하게 내려졌다. 주로 밤샘 마감을 하고 지하철에 탔는데, 옆 사람이 우리 잡지를! 그것도 내가 쓴 페이지를 펼쳐놓고 읽을 때면 “여기 그 기사를 쓴 사람이 있다고요!” 하고 말을 걸고 싶다가도, 못난 문장이 발각되지 않을까 읽는 이의 표정을 바삐 살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잡지에서 매주 같은 아이템을 다루다 보니, 행여 내 기사가 더 못 쓰지는 않았을까 예민해지기 일쑤였다. 아이템이나 인터뷰이를 뺏기는 걸 “물 먹었다”라고 하는데, 그래서 잡지가 나오는 날이면 타 잡지부터 먼저 확인했다. 그렇게 자신의 글이, 활자화 되어 낙장불입의 결과물로 인쇄되는 무시무시한 프로세스 안에서 모두가 언제나 치열해야 했다.
격전지가 형성되던 시장에서 전쟁이 불가피하던 시기였다. 특히 표지 전쟁이 극심했다. 출퇴근길 스마트폰 대신 가판대를 보던 시기야말로 영화 주간지의 황금기였다. 표지 모델이 누구냐에 따라, 한 시간이라도 먼저 가판에 걸리느냐에 따라, 판매 부수도 늘어났다. 동일 마케팅의 결과로 같은 주에 같은 배우를 표지에 내세우는 경우도 많아졌는데, 그때 어느 잡지의 표지 퀄리티가 더 좋느냐도 비교의 대상이자, 촉각이 곤두서는 결과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새벽 2시. 마감이 끝난 후 사진팀 선배가 들를 곳이 있다며 얼른 가방을 챙겨 나오라고 했다. 얼마 전 창간한 잡지사에 격려차 방문해보자는 것이었다. 한창 마감 중인 그곳에 인사를 전하고 나오는 길에 선배가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이번 주는 우리가 이겼어!” 아니 이렇게 유치할 수가. 면전에서 타박을 하긴 했지만, 같은 배우를 찍는다는 소문을 입수한 후 전전긍긍했던 마음도 이해가 안 된 건 아니었다.
처음 들어간 잡지사에서 버티지 못한 것도 생각해보면 그놈의 경쟁 때문이었다. 퀄리티는 아랑곳 않고 “좀 더 빨리 마감하라”라는 편집장의 종용에 질려하던 차에 급기야 사달이 났다. 당시 편집장은 경영난이 극화된 잡지사를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전혀 엉뚱한 분야에서 스카우트되어 왔다. 판매 부수를 올리려는 의욕이 넘쳤던 분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초콜릿> 기사 사건. 영화 시사도 전이었는데 빨리 발행을 해야 하니 ‘미리’ 마감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영화도 안 보고 어떻게 리뷰를 쓰냐”는 동료의 답변에 편집장이 사무실이 울리도록 냅다 소리를 쳤다. “<초콜릿>이고 나발이고!” 파티션 너머로 들리는 고함 소리에 곧장 짐을 싸고 사표를 쓴 건 정작 나였다. 여긴 아니다, 이렇게 잡지를 만들어서 뭐 하나. 서럽고 분통 터졌다.
과열된 만큼 그 열기에 흥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적이 앞서는 완전한 경쟁구도와 별개로, 우리는 영화, 음악, 책 등 대부분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같은 일 하는 또래의 청년들이었다. 만나면 대화의 수렴점은 늘 영화였다. 취재차 지방, 해외 출장을 같이 가면 경쟁지 기자라는 건 잊고 그날 본 영화나 촬영 현장에 대해 함께 떠드느라 바빴다. 사실 서로의 잡지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고, 현장 스케치, 인터뷰, 시사 등 취재 라인이 겹쳐서 어느 잡지사 숟가락이 몇 개인지, 구성원이 누구인지 아는 등 영화잡지 기자들 대부분이 선후배 사이였다. 하나둘 소속 잡지사를 떠나도 영화제나 영화사 등에서 일을 하는 편이라 지금까지 업계에서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 일을 하며 영화를 보다 보니 ‘사람’이 남았다.
매주 벌어지는 이 ‘치열한 전쟁’을 통과해 영화인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도 영화의 곁에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눈물샘 제조기로 정평이 난 <타이타닉> <인생은 아름다워>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같은 영화 옆에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같이 줄 세운다. ‘슬픈 영화’ 카테고리로는 뭔가 이상하지만, 쏟아낸 눈물의 총량으로는 내게 앞선 영화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다. 주인공 월터 미티는 잡지 <라이프>의 사진 현상부에서 장장 16년을 근속한 직원이다. 70년 역사의 잡지도 디지털, 온라인 시대에 더 이상 수익률을 기대하기 힘들어 오프라인 잡지 폐간을 결정한 시기에, 월터는 <라이프> 최고의 작가가 숨겨놓았다는 ‘삶의 정수’가 되는 결정적 사진 한 컷, 마지막 호 표지에 실릴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 나서며 인생에 있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판타스틱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의 끝, 미티가 그토록 찾아다닌 표지 사진은 바로 16년의 근무 시간 중 어느 별스럽지 않은 평범했던 하루, 잡지사 건물 앞 화단에 앉아 햇빛에 필름을 살펴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뉴욕 거리를 걷다가 가판대에서 자신의 모습이 프린트 된 사진을 보는 월터를 따라 나도 엉엉 울었다. 마지막 호로는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선택이다.
그와 함께 오랫동안 일해온 거장 포토그래퍼 숀 오코넬(숀 펜)은 한 권의 종이 잡지가 발행될 때까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월터에게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박수를 쳐준다. <라이프>지의 현상 담당 월터를 보면서, 사라져가는 아날로그의 시대, 그리고 그 아날로그 시대에 매주 복잡한 공정을 거치며 마감을 거쳐온 내 ‘라이프’도 자동 연상됐는지 모른다. 이보다 더 잡지쟁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주제가 같은 영화가 또 있을까.
<계속>
이화정 영화기자
前 「씨네21」 기자
前 「필름2.0」 기자
前 「무비위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