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2022)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물론 최근에 아이가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육아의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아이를 키워내는 과정을 통해 한 가족을 만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몸도 가누지 못했던 아이를 보호하고 또 키워내면서 부부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꽤 많은 힘이 들어가는 그 육아의 과정에는 어렵고 힘든 일이 포함되어 있지만 아이의 웃음 한 번에 그런 마음이 사그라들기도 한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육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만큼 더 신경 쓰게 된다. 그 과정 자체가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힘든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직장이나 일 때문에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가야 하는 경우 같은 급한 상황이 바로 그런 때다. 아직 한국 사회는 아이 때문에 일을 빠지고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유연하지는 못하다. 물론 과거보다 많이 유연해지긴 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육아 휴직제도를 이용하고 또 개인 연차 휴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개별 구성원들의 인식은 아직 거기에는 따라기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실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현재에도 아직 더 많은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육아를 맞이한 많은 직장 여성들은 제대로 자신의 경력으로 다시 복귀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송사 간판 앵커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영화 <앵커>는 방송사의 간판 앵커로 자리 잡은 세라(천우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방송사 9시 뉴스를 진행하고 있는 간판 앵커다. 어느 날 자신에게 온 전화 제보를 받게 되고 관련한 취재를 하던 중 제보자와 그의 딸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사건을 통해 만나게 되는 정신과 의사 인호(신하균)를 만나게 되고 이상한 점을 느낀 세라는 계속 그 사건에 매달리며 이상한 환영을 보게 된다. 세라의 주변에는 엄마 소정(이혜영)이 있고 소정은 늘 세라에게 잔소리를 한다. 세라가 제보자의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소정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버린다.
영화는 세라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엄마 소정도 영화의 중요한 동력이다. 이 모녀 관계는 소정이 세라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혼자 키운 소정의 입장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영화가 후반부에 공개하는 엄마 소정에 대한 반전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미스터리 스릴러 형태로 이야기를 구성했지만 영화는 내내 엄마 소정의 사연을 공개하기 위한 디딤돌을 놓기 바쁘다.
세라는 9시 뉴스 진행자로 자리 잡았지만 무척 불안해 보인다. 그를 대체할 수 있는 후배는 그를 견제하고 기회만 되면 자신이 돋보일 기회를 찾는다. 영화는 그 과정에 세심하게 집중한다. 또한 세라는 남편과 아이를 만들어 키우는 것에 이견이 있다. 세라는 아직 아이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계속 말한다. 이런 것을 종합해서 보면, 세라는 이제 겨우 올라간 간판 앵커라는 자리를 뺏기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만약 임신을 하게 된다면 그가 그동안 이루어놓은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는 수많은 대체자 중의 하나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세라의 머릿속에는 그렇게 자신의 경력이 망가지는 그림이 수없이 반복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세라가 겪는 불안으로 현재 직장 사회가 직장 여성에게 주는 불안을 잘 표현하고 있다. 직장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여성이더라도 임신과 육아의 과정을 거치면 경력이 중단된다. 그리고 다시 일을 시작할 즈음이 되면 중요한 자리에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일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직장에서 해고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런 분위기 탓에 결혼을 했더라도 쉽게 임신의 단계로 발을 내딛지 못한다. 그 상황이 주는 불안감이 영화 속 세라가 겪는 혼란스러운 얼굴에 그대로 담긴다.
정신과 의사 인호는 믿을 수 없을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 만들어내는 스산한 기운은 배우 신하균의 얼굴로 만들어진다. 그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에 대한 판단을 뒤로하고 그가 세라를 환자로 대하는 과정을 보면 세라가 겪고 있는 불안감을 잘 알고 있는 눈치다. 하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기 어렵다. 그가 세라에게 더 아픈 상처를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도우려는 것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파악하기 어렵다. 이런 점들은 세라 주변의 사람들 또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임신을 앞둔 여성들의 주변 동료들은 임신에 대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임신 상황이 닥치면 얼굴을 바꾸는 동료들도 많다. 그런 것들도 세라의 불안감을 더 크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캐릭터로 드러나는 직장여성의 경력단절에 대한 불안감
영화 <앵커>는 결국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직장 여성으로서 겪어야 할 사회적 불안감에 대한 영화다. 출산율 자체가 낮아지고 있고,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문제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문제다. 영화 속 세라의 엄마인 소정의 이야기가 이 문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여자라는 존재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받는 사회적 불안감이 세습을 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생각에 씁쓸해지기도 한다.
세라 역을 맡은 배우 천우희는 실제 앵커처럼 발성을 연습해 실제 뉴스 진행을 해도 될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그가 겪는 두려움과 혼란이 잘 표현되고 있고, 결국에 분노로 표출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엄마 소정 역을 맡은 배우 이혜영은 오랜만에 극장 개봉 영화에 모습을 드러냈다. 꽤 차갑게 딸을 관리하고 제어하는 모습의 엄마를 연기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따뜻하지만 어떤 모습은 섬뜩하게 느껴진다. 정신과 의사 인호 역은 사실 이 영화의 핵심 역할은 아니지만, 세라를 진실로 이끄는 인물이다. 배우 신하균은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를 오가며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정지연 감독은 주로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커리어를 쌓아왔다. <봄에 피어나다>라는 단편영화로 2008년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대상을 수상했고, <소년병>으로 영등포국체초단편영화제 SESIFF 심사위원 특별상을 타기도 했다. 그가 연출한 장편 영화 <앵커>는 사실 보면서 여러 영화들이 떠오를만한 장면과 상황들이 많다. 또한 쉽게 예측 가능한 영화의 결말이나 반전도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 싶어 하는 주제와 문제의식만큼은 끝까지 또렷하게 남기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앵커>
https://www.youtube.com/watch?v=guYrFwQwgu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