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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빗구미 Jun 03. 2018

짧은 희망의 빛을 찾다, 결국 분노를 태우다

-버닝(2018)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삶의 경험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초록 물고기(1997)였다. 대학교 때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하여 보았는데, 그 영화에 완전히 도취되어 몇 번이고 관람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그 이후 작품인 박하사탕(1999)을 극장에서 관람했는데, 그 당시에는 영화의 내용과 캐릭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20대 초반이었던 그때의 나에게는 캐릭터의 고민과 설정들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이후 30대 중반이 되어서 그 영화를 다시 봤다. 박하사탕은 내 마음에 묵직한 감정을 넣어주었다. 그 영화의 진심을 그때서야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 등의 직품은 어느 정도 삶의 경험이 쌓인 후에 더 와 닿는 영화일 것이다. 내 삶과 겹쳐 보이는 모습, 그리고 내 삶을 확장했을 때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영화에서 발견했을 때 그 감동은 더 절절해진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엔 그런 삶의 단편과 진심들이 잘 담겨있다.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장르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


 버닝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장르를 두르고 있다. 주요 중심인물인 종수(유아인)를 중심으로 해미(전종서), 벤(스티븐 연) 등 세 사람의 만남과 대화로 이루어진 영화다. 유통회사에서 알바를 하던 종수가 우연히 고향 친구인 해미를 만나면서 시작된 둘은 대화를 시작하고 자신의 삶과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초반 종수와 해미가 만나고, 벤을 만나는 때까지 잔잔히 진행되던 영화는 후반부 해미가 사라지면서 미스터리를 두각 시켜 여러 가지 새로운 상황들을 보여준다.


 종수는 20대 초반 혹은 중반의 청년이다. 조용하고, 순수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집안 사정은 여의치 않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엄마는 16년 전에 집을 나갔으며, 아빠는 폭력으로 인해 감옥에서 재판 중이다. 종수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20대가 처한 나쁜 상황들을 다 가지고 있는 캐릭터인 것 같다. 그는 알바를 하며 돈을 모으고, 폭력적인 성향의 아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주민들에게 선처 사인을 받고 다닌다. 이런 나쁜 상황 속에 있는 건 해미도 마찬가지다. 해미는 카드 빛이 많은 것으로 보이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여러 가지 사정 상 내레이터 모델 등 알바를 하며 생활하고 있다. 해미가 우연히 종수를 만난 그 순간, 종수는 어쩌면 조그만 빛이었을지 모르겠다. 해미는 어렸을 때의 일을 세세히 기억해 내 종수에게 이야기 하지만, 종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의 기억이 맞는지는 모른다. 영화는 그 기억의 순간들을 몇몇 사람에게 확인 하지만 어떤 것이 맞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까지 종수는 해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의 말을 믿는다. 해미가 아프리카에 여행 가기 전에 고양이 밥을 부탁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 고양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종수는 고양이가 있다고 믿게 된다. 아니 고양이가 없다는 것을 잊는다.



짧은 빛을 동경하고 기다리다, 그 빛이 사라지면 눈물을 흘리다.


 해미는 종수에게 판토마임을 보여주며,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현실의 20대 들에게 내가 가진 재능이 별로 없다는 것, 연결할 사회적 끈이 없다는 것, 돈이 없다는 것도 잊어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해미는 없는 것을 잊고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 해미와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사랑을 나눌 때, 해미의 집에는 하루에 한 번 들어오는 햇살이 들어온다. 직접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남산타워 유리에 비쳐서 들어오는 빛인데, 아주 잠깐 스쳐 지날 뿐이고 그 양도 많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그 빛을 기다리고 그 빛을 향유한다. 그 잠깐의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 그 얇은 빛줄기를 기다리며 어두운 시간을 보낸다. 해 질 녘에 들어오는 빛, 노을을 보면 더욱더 팔이 높아지는 아프리카 부시족의 그레이트 헝거 춤 등 해미는 하루 해가 지는 그 모습을 서글퍼한다. 영화 후반부 해미가 상의를 벗고 아름다운 노을 속에 그림자처럼 춤을 추고 나서는 펑펑 눈물을 쏟게 되는데, 아마도 그 짧은 빛, 짧은 노을 속에서 희망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일 것이다.


영화 속 철저히 대비되는 종수와 벤의 삶


 미스터리 한 인물 벤이 등장하면서 종수와 벤은 철저히 대비된다. 종수는 믿을 것 하나 없는 사람이다. 16년 만에 연락한 엄마는 돈을 필요로 하고, 특별히 슬퍼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종수의 아빠도 재판정에서 종수를 볼 때, 아무 감정이 없이 가만히 바라본다. 벤은 특별한 직업이 없지만,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지고 있고, 아주 여유로운 삶을 산다. 가족들과의 사이도 매우 좋으며, 늘 친구들과 모임을 가져 재미있는 삶을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종수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벤 에게는 산다는 것에 재미가 제일 중요하다. 종수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지만, 벤은 원하는 것은 다 일단 해본다. 특이한 점은 벤은 살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어쩌면 감정이 없는 사이코 패스거나 감정에 문제가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친구와의 모임 도중 여자 친구가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 매번 하품을 하고 있다. 그런 대비를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에 종수의 분노를 극도로 표출시킨다. 종수의 분노는 벤에 대한 분노도 있겠지만, 종수의 부모에 대한 분노 이기도 하다. 자신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들, 부모, 벤에 대한 분노는 결국 종수로 하여금 벤을 불살라 버리게 만든다.



  벤은 영화 중반에서 재미 삼아 주기적으로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이야기한다. 종수가 사는 동네의 비닐하우스도 태울 거라는 이야기에 종수는 매일 조깅을 하면서 마을의 비닐하우스를 살펴보지만 불에 탄 비닐하우스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 해미가 실종된다. 그 뒤로 벤의 여자 친구가 바뀐다. 종수가 벤의 집 화장실에서 발견한 여자의 액세서리들과 해미에게 준 시계, 그리고 해미가 키우던 고양이가 나타났을 때, 벤은 심정적으로 연쇄살인범이 된다. 영화 속 모든 상황들이 그런 암시를 주고 있다. 버려진 비닐하우스. 일반적으로 비닐하우스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버려진 비닐하우스는 멀쩡한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휸하고 상처 투성이다. 어쩌면 벤 에게는 따뜻하고 상처 없는 척하는 20대 들이 버려진 비닐하우스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주기적으로 그 비닐하우스를 태우면서 본인 가슴속에 있는 뜨거운 것을 삭혀왔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벤을 질투하던 종수에게는 더더욱 그가 해미를 죽인 사람일 거라는 심증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자신이 믿었던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버려진 비닐하우스가 되다


 해미는 종수에게 과거에 우물에서 빠졌던 본인을 종수가 구해줬다고 이야기한다. 종수는 기억하지 못하고 해미의 가족들이나 자신의 엄마에게 묻지만 그 우물이 실제로 있었는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해미는 종수를 우물 밑에서 만난 작은 빛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작은 빛처럼 믿을 수 있고, 자신을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 하지만 그 사람에게 창녀 같다는 쓴 언어를 들었을 때 삶의 빛이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완전하게 버려진 비닐하우스가 되었고, 벤에 의해 불태워졌을지도 모른다.    



 영화 버닝은 영화 속에 기본 서사는 유지하면서 무수한 은유적인 대사나 장면들을 넣어두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영상에서 의미를 찾아볼 것이고, 주인공의 캐릭터와 행동, 상황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보기도 할 것이다.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영화적으로 의미 있는 부분들도 발견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영화였다. 150분의 긴 상영 시간 동안 그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여 종수의 인생을 바로 뒤에서 따라간 듯한 느낌이 든다. 유아인의 순수한 듯 분노가 커져가는 연기, 스티븐 연의 의중을 알 수 없게 만드는 연기, 그리고 신인 배우 전종서의 발랄하지만 싶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는 연기. 모든 면에서 매력적인 영화였다.


흑수저의 금수저의 대비를 통해 분노를 표출하다


 나는 영화 속에서 현시대의 흑수저와 금수저의 대비를 가장 많이 보았다. 벤과 종수/해미의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대비되어 벗어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상수가 되었다. 모든 흑 수저들에게 벤이 가진 삶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질 수 없는 꿈같은 것이기에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편하게 살고 있는 벤에 대한 적대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벤이 재미 삼아 태우는 비닐하우스는 정말 재미 삼아하는 일이지 삶의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종수는 결국 마지막에 분노를 터뜨리며, 멀쩡한 고급 자동차를 멋지게 태웠다. 아니 어쩌면 멀쩡한 비닐하우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마 흑수저의 분노를 터뜨린 것이 의미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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