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빗구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찌릅니다. 칼이 아니라, 구조로 말이죠.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가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살기 위한’ 싸움은 늘 비슷한 사람들끼리 벌어집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냄새를 가진 사람들. 왜 우리는 자꾸 나와 닮은 사람을 적으로 삼게 되는 걸까요?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는 정리해고를 피하기 위해 다른 노동자를 제거해 갑니다. 〈기생충〉에서는 박사장네 집 아래, 또 다른 아래에서 반지하 가족과 지하실 남자가 충돌합니다. 〈송곳〉에서는 같은 유니폼을 입던 동료가 회사를 대신해 해고를 통보하죠. 세 작품 모두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나요?"
누가 먼저 찔렀는지 따지는 사이, 정작 그 송곳을 건넨 사람은 무대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용자, 회사, 고용주. 이름은 다르지만 태도는 같습니다. 본인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사람들 사이에 선만 긋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보는 존재. 그리고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자리를 정리하는 쪽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어쩔수가없다〉, 〈기생충〉, 〈송곳〉 세 작품을 통해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왜 서로를 찌를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싸움은 왜 늘 아래에서 시작되고, 아래에 남은 사람만 다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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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언제나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자리를 묻는 그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5년 10월 첫번째
-<어쩔수가없다>, <기생충>, <송곳>
노동자가 된다는 것, 그 이후의 이야기 — 〈어쩔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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