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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Nov 18. 2018

단지 세상의 끝에서, <영주>

축적된 이미지와 서사가 전하는 믿음과 소망


올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 비전' 섹션에 초청받은 <영주>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CGV 아트하우스의 첫 번째 산학협력 프로젝트로 완성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절망의 끝에 서 있는 열아홉 어른 아이 '영주(김향기)'의 아이러니한 감정에 집중하는데, 사실 양립되는 감정을 이야기하거나 공감을 유도하는 영화는 올해 여름에 개봉한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를 포함해 매년 개봉하는 한국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영주>는 이와 같은 감정을 다루는 기존의 영화와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차성덕 감독은 영주라는 인물의 주변에 널브러진 여러 이미지를 활용함으로써 상황에 따른 인물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이 영화는 화면 속 인물의 헤드 룸(head-room)과 아이 룸(eye-room)을 최소화하는 촬영 방식을 이용함으로써 절망의 끝에서 상처를 공유하는 일이 과연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끌고 가는 점이 눈에 띈다.



절망의 끝과 널브러진 이미지


영주는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순식간에 부모를 잃고 하나뿐인 동생 '영인(탕준성)'과 힘겹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고모와 고모부는 어른들 말씀 잘 들으라며 영주에게 집을 팔라고 강요하지만, 영주는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더라도 동생만큼은 본인이 책임지며 부모와의 추억이 깃든 집을 어떻게라도 지켜내려고 한다. 이와 같은 영주의 마음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옛날에 치킨은 축제날이나 스포츠 경기를 볼 때 먹는 특별한 음식이었지만, 오늘날 치킨은 더 이상 특별할 때 먹는 음식이 아닌 대화를 나누면서 먹는 일상적인 음식이 되었다. 동생 영인이 약간 어긋난 모습을 보여도 영주는 동생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치고, 닭다리까지 챙겨준다. 오프닝 시퀀스에 담긴 영주의 모습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지금처럼 소소하게 웃을 수 있고 동생과 함께 하는 삶을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주의 바람과 달리 영인은 결국 사고를 치게 되고, 영주는 하나밖에 없는 집을 팔아야 할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열아홉 어른 아이에게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영주는  집과 동생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현실은 영주를 외면한다. 이를 여러 널브러진 이미지들로 묘사한다. 예를 들어, 동생이 소년원에 가기 전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전달하기 위해 영주는 대출을 알아보는데, 국가적인 보조나 주변 어른의 도움 없이 바로 대출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영주의 절망스러운 현실을 거리 위에 널브러진 대출 전단지와 명함으로 표현한다. 가혹한 현실에 분노하는 영주의 모습 또한 비슷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사기를 당하자 분노와 슬픔에 잠긴 영주는 동생 방의 물건을 꺼내 거실에 널브리는데, 이때 엄마와 아빠 제사상과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물건들이 하나의 몽타주를 형성함으로써, 지금 상황을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원망스러운 영주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외 책상 위에 올려진 공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영주가 공처럼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위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좋아졌습니다. 날 아프게 만든 사람들인데...'


금전적인 도움이 절실했던 영주는 부모를 죽게 만든 가해자 '상준(유재명)'과 가해자의 아내 '향숙(김호정)'을 찾아간다. 처음에 영주가 상문에게 아르바이트 필요하지 물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곁에 있으면서 영주는 본인이 몰랐던 그날 사고로 인한 향숙의 상처를 알게 된다. 게다가, 열아홉 살이지만 여전히 부모의 돌봄이 필요했던 영주는 대가 없이 자신을 보살펴주는 향숙의 손길에 정을 느끼며 자신을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서서히 좋아하게 된다. 영주가 향숙과 상문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영주의 달라진 옷차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주는 그동안 돌아가신 엄마의 옷을 입고 돌아다녔지만, 어느 순간 향숙이 사준 옷을 입으며 매일 출퇴근을 한다. 엄마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영주가 묵묵히 동생을 보살폈지만, 본인 역시 누군가의 보살핌을 갈구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영주가 두 사람과 함께 저녁 식사를 장면에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향숙이 영주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을 때, 영주는 처음에 거절하지만, 나중에 마음이 바뀐다. 그동안 식사 자리에서 동생만 챙기던 영주는 오랜만에 향숙으로부터 이것저것 챙김을 받으며 진심으로 미소를 짓는다. 따라서, 향숙뿐만 아니라 영주도 함께라면 삶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주는 계속 내적 갈등을 겪는다. 왜냐하면 동생이 피해자와의 합의금이 부모를 죽인 가해자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난 충격에 빠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주의 표정에는 항상 양가감정이 드리운다. 영주는 향숙과 상문에게 진실을 전할지 말지 고민하지만, 진실을 숨기게 되면 동생이 받는 상처가 너무 심한 반면, 진실을 고백하면 그동안 자신을 딸처럼 보살펴준 두 분에게도 상처를 주기 때문에 내적 방황을 겪게 된다. 내적 갈등이 고조되었음을 온전한 모양이 훼손된 두부가 도로 위에 흐트러진 이미지로 묘사한다. 하지만, 영주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는 본인의 죄책감을 덜기 위함도 아니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함도 아닌, 서로 함께 삶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영주가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화의 엔딩은 다시 한번 영주를 절망의 끝으로 밀어낸다. 엔딩은 분명 다양하게 해석될 것이다. 누군가는 영주가 세상의 끝에서 결국 무너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하염없이 울던 영주가 눈물을 그치고 다시 걸어간다는 점에서 비록 현재 세상의 끝에 서있어서도, 단지 세상의 끝뿐일 테니 영주답게 꿋꿋하게 버텨내며 잘 살아갈 거라는 희망과 진짜 그러길 바라는 소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엔딩이 어떻게 해석이 되든 <영주>는 양가감정을 끝까지 끌고 가면서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파생되는 복잡 미묘한 온기를 느끼며 인간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 편의 좋은 한국 독립영화가 등장했다고 말하고 싶다.



* 이 글은 아트렉처에 발행하는 글과 같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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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8.11.13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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