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카토(staccato)의 전개, 레가토(legato)의 유머와 메시지
<걷기왕> (2016)을 통해 무조건적 열정을 강요하는 현실에 지친 현대인에게 '느려도 괜찮아'라는 위로를 건넨 백승화 감독은 이번에는 웹 드라마 형식을 차용한 <오목소녀>로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감의 늪에 빠진 현대인에게 '져도 괜찮아'라는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걷기왕>에서는 경보, 이번 <오목소녀>에서는 오목이라는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스포츠 종목을 메시지 전달 매개로 삼아 비주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과 함께 확고하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올해 봄 우리에게 각자의 취향과 행복이 안녕한지 물어봄으로써 현대사회에 필요한 것은 소확행(小確幸) 임을 이야기한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 (2017)처럼 <오목소녀>도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소확행(小確幸)이지만, 이바둑(박세완), 조영남(이지원), 김안경(안우연), 동거인(장햇살), 쌍삼(김정영) 등 보다 더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의 앙상블의 힘을 입어 작지만 진정한 행복에 다르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스타카토(staccato)의 전개: 제 1수 천원점(天原點)부터 제 5수 오목(五目)까지
영화는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피소드 간의 연결은 악보상에서 음을 원래 박자가 아닌 절반 정도의 길이로 끊어서 부르거나 연주하게 하는 스타카토처럼 여러 챕터로 구성된 영화들이 보여준 일반적인 매끄러움과 거리가 멀다. 이는 백승화 감독이 단순히 오목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해 웹 드라마의 형식을 착용한 것과 면밀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좀 더 즐기려고 할 때쯤 끝나면서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다소 낯선 느낌을 받았지만 오목의 한 수를 둘 때마다 적응하게 된다. 더 나아가, 각 에피소드 제목의 의미를 의식하면서 본다면 어느새 영화에 깊이 빠져들게 되면서 감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수긍하게 된다.
제 1수 천원점(天原點)은 오목판의 정중앙을 가리키며 오목의 첫 수는 무조건 천원점에 두어야 한다. 제 2수 착수(着手)는 첫 수를 포함한 오목판 위에 돌을 놓는 행위를 의미하고, 제 3수 쌍삼(雙三)은 열린 3이 두 개 씩이나 형성되는 상황을 뜻한다. 제 4수 포석(布石)은 오목을 만들기 위해 본인에게 유리하게 쉬운 모양으로 돌을 놓아두는 행위를, 마지막 제 5수 오목(五目)은 일직선상에 같은 색깔의 돌 5개가 나란히 놓인 모양을 의미한다. 결국, 다섯 가지 오목 용어는 표면상 각 에피소드의 이름이지만, 실은 오목을 형성해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단순하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련의 과정은 이바둑처럼 최고를 꿈꿔왔지만 현실은 주변의 행복마저 잃고 있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처방전으로 다가온다.
레가토(legato)의 유머와 메시지: 부드럽게 이어진 유머 코드와 주제의식
영화의 전개 방식과 달리 유머 코드는 계속되는 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고 연주하거나 부르라는 레가토처럼 새로운 에피소드가 진행되어도 부드럽게 이어진다. <오목소녀>는 다양한 영화를 다채롭게 오마주 하거나 패러디했는데, 예를 들어, 흰 장갑으로 감춰져 있었던 김안경의 왼손 캐릭터는 <기생수 파트1> (2014)과 <기생수 파트2> (2015)의 '오른쪽이' 캐릭터를 연상케 하고, 패배 위기에서 이바둑이 내뱉은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라는 대사는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 (2015)에서 진실을 추적하는 '연홍'의 혼잣말을 익살스럽게 재해석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김안경의 왼손 캐릭터는 CG가 아닌 수작업으로 탄생했고, 바둑돌에 깔리는 악몽을 꾸는 이바둑의 모습도 소품으로 연출했다. 캐릭터, 대사, 소품 등 영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각 에피소드에서 발견할 수 있을뿐더러 점차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한때 바둑 신동으로 유명세를 치른 이바둑은 승리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무너지기 시작해 현재는 기원 알바를 하면서 지루한 삶을 매일 보내게 된다. 우연히 오목 대회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녀는 오목이 바둑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만만하게 생각하다 다시 한번 좌절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의 꽉 막힌 인생을 뚫기 위해 열심히 오목 훈련을 받게 되었고 그녀는 오목 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4강의 문턱을 서게 된 이바둑은 다시 승리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는데, 그러나 그녀는 옛날과 달리 무너지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경기를 위해,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앞으로의 삶을 위해 침착하게 자신이 둘 수 있는 수를 두며 결국 4강에 진출한다. 안타깝게도 힘이 빠진 이바둑은 4강전에서 패배해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아닌 소소하지만 진정한 행복의 기운이 돌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줄거리가 다양하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유머 코드의 파급효과 덕분에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이어지면서 "별 거 아닌 오목 덕분에 일상이 조금 더 즐거워진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백승화 감독의 생각에 비로소 동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우리 모두 꿈만 바라보고 전진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 때문에 순간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성공에 눈이 멀어 우리 주변을 망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오목소녀>가 다시 깨닫게 도와준다. 무언가에 쫓길수록, 그리고 어떤 이유로 점차 초조해질수록 우리는 방황하기보다 오히려 침착하게 각자의 일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런다면, 우리는 엄청난 기쁨을 느낄 수 없더라도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소공녀>에 이어 다시 한번 확신한다.
관람 인증
1. 2018.05.27 (홍대 상상마당 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