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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Oct 13. 2018

존재의 클라이맥스, 죽음
<클라이맥스>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스파 노에 감독만의 접근법 및 확장법


"존재는 덧없는 환상이다."


이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섹션에 초청받은 가스파 노에 감독의 신작 <클라이맥스> (2018)는 제71회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아 최고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평단의 반응과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려 보인다. 물론, 전작 <러브> (2015)에 비해선 <클라이맥스>는 생각보다 덜 강렬하지만, 여전히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묘사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보는 내내 고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클라이맥스>는 오프닝에서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가스파 노에 감독은 이를 타인이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정신세계에 투영함으로써 여러 수위가 높고 강렬한 이미지로 구체화했다. 과연 수많은 이미지들을 통해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클라이맥스>는 단순히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마도 존재에서 비존재로의 이동을 다루는 영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선, <클라이맥스>는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글씨가 크거나 색깔이 있는 문구를 집어넣는다. 이는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장 뤽 고다르 감독처럼 관객들의 비판적인 사고 혹은 주체적인 사고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지만, 가스파 노에 감독은 의도적인 문구 삽입을 통해 클라이맥스의 방향을 관객들에게 언질을 준다고 추측할 수 있다. <클라이맥스>의 엔딩 크레디트는 역순으로 오프닝과 중반부에 삽입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문구 삽입으로 대체한다. 이는 한 편의 결과물이 백지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연을 위한 리허설을 마친 댄서들은 공간 뒤편에 걸린 프랑스 국기의 청색처럼 자유를 갈망할뿐더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무용을 한다. 즉, 그들의 무용은 처음에는 목적이 있는 육체적인 움직임이다. 하지만, 특정 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게 격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리허설을 마친 뒤 무용수들은 파티를 시작한다. 이들은 파티를 즐기면서 상그리아를 즐기는데, 점점 하나둘씩 무엇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댄서들은 미치기 시작했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는커녕 숨겨왔던 야수성을 표출한다. 이와 같은 혼돈의 상황을 롱테이크와 위아래가 뒤집힌 이미지를 지속해서 보여줌으로써 표현한다. 이전과 달리 그들의 육체적인 움직임은 본래의 목적성을 잃은 채 징그러울 정도로 관절을 꺾으면서 이상한 형태의 움직임으로 변질되었다. 무옹수들은 인터뷰 진행할 때 말했던 바와 달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존재는 덧없는 환상이나 다름없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자유를 갈망하는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함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되레 자신들의 공통된 목표를 성취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로 만들면서 스스로 무너진다. 검붉은 색감으로 가득 찬 공간과 대비되는 빛은 유일하게 하얀색이다. 색감의 대비는 하얀빛과 눈을 얼핏 심신으로 엄청난 혼돈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 유일한 배출구로 그린다. 



"죽음은 기이한 경험이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에서 하얀색은 비정상적인 세계 혹은 정상적인 세계로부터 버려진 소외감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경찰관이 도착했음에도 여전히 위아래가 뒤집힌 공간으로 묘사된다. 만약 무용수들이 마신 상그리아에 든 환각제가 무언가를 상징한다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주장이 위에서 언급한 역순으로 삽입된 엔딩 크레디트와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계몽주의를 계기로 인간은 이성을 믿기 시작했고, 그 이성이 세부적으로 나뉘면서 이를 바탕으로 과학과 기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맹목적인 이성의 믿음은 점점 사회문제를 야기하면서, 21세기에는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각종 사회문제들이 터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무용수들로, 반응하게 만드는 사회문제가 상그리아에 든 환각제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가스파 노에 감독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이 '죽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통해 고통을 야기하는 존재나 타인이 일으킨 고통에 당하는 존재는 더 이상 세상에서 목격할 수 없는 비존재가 된다. 암울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기이한 경험이라고 표현되는 게 아닐까 싶다.



* '아트렉처'에 발행하는 글과 동일합니다: https://artlecture.com/event/view?id=353

* 관람 인증

1. 2018.10.07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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