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1.
2025년 여름에 개봉한 <슈퍼맨>에는 슈퍼맨의 귀엽지만, 매우 강력한 반려견 크립토가 등장한다. 이 귀여운 강아지는 영화의 감독이자 DC 유니버스의 새로운 수장인 제임스 건(그는 옆동네인 마블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이끈 전례가 있고, 수장이 되기 전 DC에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역시나 실력을 증명한 바 있다)가 입양한 유기견인 오즈(Ozu)를 모티프로 한 캐릭터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감독이 <오즈의 마법사>를 재밌게 보았나 싶었다. 하지만 영어로 쓰인 이름이 뭔가 일본틱(?)해서 찾아보니 오즈 야스지로라는 감독의 이름을 딴 것이란다. 일단 너무 생뚱맞아서 웃겼고, 그다음에는 말로만 들었으나 한 편도 보지 못한 오즈 야스지로라는 감독이 궁금해졌다.
영화에 관심이 있던 사람으로서 다다미 쇼트 정도만 들어봤을 뿐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그가 어떤 예술관을 가졌는지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문득 그의 필모그래피를 파보고 싶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브런치에서 글을 쓰게 된 이후로 뭔가 작가처럼 책을 써보고 싶었고, 평소에 한 감독을 정해서 필모그래피 정주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감독 필모 도장 깨기 시리즈를 연재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 그 첫 삽으로 오즈 야스지로를 택했다.
오즈 야스지로는 많은 고전영화감독들이 그렇듯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옛날에 데뷔를 했다. 무려 1927년인데, 이때에는 우리가 한창 일제강점기를 겪던 시절이라 그 시절에 나온 영화들을 보기가 좀 거북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옛날부터 카메라를 잡았는지라 소실된 영화들도 많고, 일부만 남은 영화들도 많았다. 그래서 소실되지 않은 영화들만 모두 뽑아보니 33편이 뽑혔다. 한 연재당 30개의 목차만 가능하다길래 덜 유명한 영화들을 2~3개씩 하나로 묶어 한 목차로 설정했다가도 아직 보지 않은 입장에서 그 영화들을 애초부터 덜 중요한 영화라고 프레임을 씌우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그리하여 무려 2권에 나누어 연재하기로 결정하였고, <동경 이야기>, <만춘>처럼 유명한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에 같은 애정을 담아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처음으로 뽑힌 영화는 한글 제목부터 괴랄한 <학생 로망스 젊은 날>이다.
영화랑은 별개이긴 한데, 한글 제목이 정~~~말 안 외워지더라. 일단 어떤 뉘앙스인지는 알겠다. 학생 로망스까지는 알겠는데, 갑자기 바로 뒤에 쉼표도 없이 냅다 젊은 날이 붙는다. 그래서 제목을 안 보고 다시 기억하려고 하니 무슨 "학생 젊은 로망스"처럼 자꾸만 입에 안 붙게 된다. 차라리 영어 제목인 <Days of Youth>가 훨씬 입에 잘 붙는다.
어쨌든 이렇게 이미 어색한 상태로 영화를 틀었는데, 심지어 무성영화다. 화질도 어디 히치콕 영화들처럼 깔끔한 화질도 아니고 화면에 노이즈도 상당했다. 와...첫 영화부터 너무 빡센데 싶었는데 그 이름에 담긴 무게에 비해 상당히 가벼운 영화였다.
줄거리는 이렇다. 한량 느낌 물씬 나는 대학생(!) 와타나베는 자신이 사는 방에 빈 방이 있다는 종이를 붙이고, 방을 원하는 사람이 오면 그걸 떼어 이젠 없다고 말하는 이상한 남자다. 처음엔 뭔 상황인가 싶었지만, 이윽고 미인 한 명이 나타나자 실실 웃는 걸 보고 간파했다. 이 놈은 여미새구나. 그렇게 그는 치헤코라는 여성에게 방을 주고 다음 날 나가기로 해놓고 시답잖은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치헤코는 만만한 여성이 아니었고, 그를 나가게 한다.
그렇게 와타나베는 동기 야마모토의 집에 눌러앉게 된다. 사실 치헤코는 야마모토와 썸을 타는 사이로 와타나베는 그 사실을 모른다. 와타나베는 치헤코를 꼬시려고 계속해서 어슬렁거리고 결국 아키쿠라의 스키장에 함께 가기로 한다. 친구인 야마모토 역시 함께 따라가게 되는데, 이윽고 와타나베가 꼬시려는 여성이 자신의 썸 상대라는 걸 알고 분개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치헤코는 와타나베에 마음이 기운 것처럼 보이고 두 남자의 우정에는 금이 가게 된다.
그러나 와타나베 역시 야마모토와 같은 어장 속 남자임을 알게 된다. 치헤코는 결국 더 매력이 넘쳐 보이는 남자에게 가버리고 이 둘은 동시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앙금은 녹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기류를 계속해서 이어가다가 눈에서 넘어진 야마모토를 와타나베가 부축해 주면서 화해를 하게 되는 사실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이야기만 들으면 그리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가 그렇다고 복잡한 플롯을 가졌거나 기교를 부리는 장면도 없다. 그저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스키장에서 시시껄렁한 장난을 하는 모습만 등장할 뿐이다. 솔직히 거장들이라고 해도 초기작들은 허술한 경우가 많은데, 오즈 야스지로 역시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자꾸만 여운이 남는다. 걸작을 봤을 때 느껴지는 깊은 여운이 아니라 자꾸만 이 두 친구의 이상한 우정이 머리에 남는다.
이 둘의 대립 구도는 사실 줄거리만 봐도 알겠지만 그리 흥미롭지 않다. 실제로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스키장 장면도 슬랩스틱에 불과할 뿐 그리 흥미롭진 않다. 그런데 후반부 갑자기 모두가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한창 화가 나 있는 야마모토는 처음엔 춤을 추기 싫어했지만 분위기를 망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춤을 춘다. 하기 싫지만 천성이 착해 어쩔 수 없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거나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사실 야마모토는 영화 내내 그리 호감도 아니고 숙맥에 바보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 장면에서 그가 바보가 아니라 그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 뭔가 이유 모를 따뜻함이 느껴진다. 마치 최근 정말 재밌게 보았던 <여행과 나날>의 여관에서 몸을 녹이는 여행자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푸근함이 이 영화에서 느껴진다.
사실 와타나베도 마찬가지다. 생긴 게 좀 무섭게 생겨서 그렇지 그 역시 남을 피해 주지 않고 그저 한눈에 반한 여자에게 직진하는 순정남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여자를 기분 나쁘게 하거나 희롱하지 않는다. 방에서 나가라면 나갈 뿐이고, 여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차를 끓여준 것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고 말이다.
영화가 항상 힘을 주고 때깔이 예뻐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게 되면 관객의 입장에서 정말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도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증명한다. 무릎을 탁 치는 이야기가 없어도, 매력 넘치는 인물들이 없어도, 연출 기법이 투박해도 그저 그 시대의 공기를 담은 채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은 영화라면 그 영화는 이미 자신의 소명을 다한 영화다. 요즘 영화들의 단점으로 인물들이 작품 속 세계관에 잘 녹아들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즈 야스지로의 소실되지 않은 첫 영화인 <학생 로망스 젊은 날>는 그런 면에서 정말 기분 좋은 영화였다. 참 착해서 좋은, 딱 그것만으로 기분 좋은 영화였다. 시작이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