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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송 Sep 04. 2019

클리셰로부터 엑시트!

영화 <엑시트>

왜 한국의 히어로는 ‘한국형 히어로’라 불리면서 죄다 짠내가 나는지 묻는 이가 있었다. 왜 우리는 아이언맨과 다크나이트처럼 멋진 슈퍼히어로를 한국형 히어로라 부를 수 없는 거냐는 물음. 아주 아주 솔직한 심정은 ‘한국은 미국처럼 실제로 세계를 제패해본 적이 없어서이지 않을까’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무기를 팔았던 아이언맨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캡틴 아메리카도 마천루의 뉴욕을 상징하는 고담시의 다크나이트도 우리 한국 관객들이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어찌 되었건 우리의 것은 아니다. 너무나도 솔직한 심정. 동시에 ‘왜 한국의 히어로는 미국의 슈퍼히어로처럼 굴어야만 하지?’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왜 짠내가 좀 나면 안 되는지, 왜 굳이 남의 슈퍼히어로 형태를 모방해야 하는지 말이다. 왜 세계를 정복한 ‘척’을 해야 하는가.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굳건히 나라를 지켜온, 짠내는 좀 나도 결코 역경에 굴하지 않은 한국인인 걸 왜 잊어야 하는가. 마블의 슈퍼히어로를 보며 구경하는 재미를 느꼈다면 반대로 한국형 히어로, 지극히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우리네 히어로를 보며 깊이 공감하는 것이 결단코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물론 언젠가 멋짐으로만 도배한 한국형 히어로가 새롭게 등장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기꺼이 박수쳐줄 것이고.


<엑시트>는 바로 그 짠내 나는 ‘한국형 히어로’가 등장하는 재난영화다. 짠 내 폴폴 나는 용남(조정석)과 의주(윤아)가 유독가스가 퍼진 재난 상황에서 가족과 손님들, 학생들, 그리고 스스로를 구출하기 위해 애쓴다. 평소에는 동네 바보 취급받는 백수이거나 아르바이트생과 다를 바 없는 을인 부점장 히어로들. 지극히 일상적인, 너무나도 평범한 히어로들. 그들은 오로지 가는 루프에만 의지해 맨손으로 힘겹게 벽을 타오르고 맨몸으로(혹은 분홍색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보호막으로 몸에 두른 채) 유독가스를 피해 달린다. 할리우드 히어로와는, 역시나 거리가 멀다. 그런데 한편으로 <엑시트>에는 한국 상업영화의 클리셰를 피해 가며 가장 한국 상업영화에서 멀어진 신선함이 있다. 신파도 악역도 민폐도 무능한 공권력도 <엑시트>엔 없다. 영화는 오로지 탈출만을 위해 내달린다. 그래서 <엑시트>는 가장 한국적인 캐릭터들의 재난 탈출기면서도 한국인들이 한국영화의 클리셰라 여기는 것들에서는 모두 탈출한 신선한 한국 상업영화다. 그리고 그 결과 <엑시트>가 올여름 가장 흥행한 한국영화가 되었다. '그 결과'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익숙함과 새로움 그 모두를 <엑시트>가 해냈고 그것이 관객의 마음을 동한 것이 분명하니까.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에 집중한 영화

<엑시트>의 진가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보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에 집중한 점에서 드러난다. 하나. 신파 보여주지 않기. 칠순잔치에 모인 일가친척들 설정만으로 신파의 온갖 경우의 수가 쏟아져 나오지만 <엑시트>는 울어라 울어! 하는 장면을 결단코 보여주지 않는다. 가족들은 용남을 걱정하고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충실히 해낼 뿐 관객들의 눈물샘을 쥐어짜기 위해 소모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가족이란 이름에만 묶여 개성을 잃기 쉽던 캐릭터들이 매력을 발산한다. 노래방 기계를 가지고 와 따따따 구호의 박자를 틀리는 삼수생 사촌동생이나 친구들 앞에서 백수 삼촌을 모른 척하다가 유독가스 속에 남겨진 삼촌을 걱정하는 조카는 짧은 등장에도 인상적인 캐릭터가 된다. 관객은 생생한 캐릭터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빠져들고 자가발전으로 희로애락을 느낀다. 마냥 웃고 싶으면 웃어도 좋고 웃기지만 슬프다면 슬퍼해도 좋고. 관객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감응을 주입식 신파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둘. 멋있는 슈퍼히어로 보여주지 않기. 앞에서도 말했지만 <엑시트> 속 사람들을 구하는 용남과 의주는 천하무적 히어로가 전혀 아니다. 용남은 동네서 철봉으로 근육을 만들던 백수였고 의주는 말이 부점장이지 아르바이트생들과 비슷한 일을 하며 점장의 눈치를 보기 바쁜 을이었다. 아이언맨 슈트를 입거나 람보르기니를 타는 슈퍼히어로를 닮기는커녕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용남의 가족들, 손님들을 헬기에 태워 먼저 태워 보내 놓고 의주는 뒤돌아서 자신도 타고 싶었다며 몰래 우는 지극히 평범한 영웅이다.  


셋. 민폐 캐릭터 만들지 않기. 악역 만들지 않기. 여성 캐릭터 또한 무기력하게 그리지 않기. 재난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민폐 캐릭터, 관객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캐릭터가 단 한 명도 없다. 가족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예식장으로 피신한다. 누군가를 구하러 1층에 가는 등 시간을 지연시키는 캐릭터가 없다. 점장은 조금 얄미운 구석은 있지만 사사건건 탈출의 발목을 잡는 악역이 되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옥상에서 합심하여 SOS 신호를 보내고 구조대원의 도움에 따라 모두 구출된다. 여성 캐릭터 의주 또한 무기력하고 연약한 존재가 아니다. 관객들은 영화의 초반, 의주가 산악반 에이스라는 용남보다 더 높이 벽을 타고 올라간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의주는 날렵한 몸으로 용남만큼 빨리 달리고 벽을 잘 타며 높은 크레인에 오르기까지 한다. 의주는 용남이 자진해서 예식장 옥상으로 가는 벽을 탈 때 즉 첫 난관을 돌파하는 중요한 시기에 등산장비를 건네고 옥상에서는 핸드폰으로 SOS 신호 보내기를 지휘하는 등 유능한 캐릭터다. 민폐 캐릭터도 악역도 무기력한 여성 캐릭터 없이 영화는 오로지 탈출만을 위해 시원하게 내달린다. 그들에게 장애물이란 오직 유독가스와 중력뿐이다.     


넷. 무능한 권력 보여주지 않기. 대신 선량한 이들의 단결력 보여주기. <엑시트>에는 보도를 위해 드론을 매수하는 보도국장의 모습이 잠깐 비치지만 권력의 모습은 그뿐이다. 헬기와 119는 성실하게 사람들을 구하고 유독가스를 물로 진압할 수 있다는 사실도 곧장 밝혀낸다. 시민들은 드론을 날려 애타게 기다리는 용남의 가족들의 눈이 되어주고 용남과 의주의 탈출에 결정적 활약도 해낸다. 용남과 의주가 열심히 뛰는 것처럼 영화 속 조단역을 물론이고 기계까지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재난을 돌파하는데 일조한다.


마지막. 구구절절 사연들 다 보여주지 않기. 그저 탈출에, 현재에 집중하고 탈출이 끝나면 미련 없이 엑시트! 과거 의주가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대사로 알게 되지만 그것이 임용고시임을 밝히지도 않는다. 의주의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오느라 의주를 기다리고 있지 못했단 이야기도 제작진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유독가스에 쓰러진 처참한 사람들의 모습을 전시하지도 않고 <엑시트>는 오로지 오르고 뛰어넘고 또 달리는 모습만 보여준다. 용남과 의주가 무사 탈출 후 썸의 가능성을 내뿜었지만 영화는 그들의 애정전선 후일담도 들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몇 년째 취업을 못해 개인적 재난에 있던 용남의 취업난 탈출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 단호함까지. 오히려 관객들이 아쉬울 만큼 영화는 깔끔하게 퇴장한다. 2시간을 넘기지 않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적당한 100분이란 러닝타임. 30분 만에 재난 상황이 펼쳐지고 70분 탈출기가 휘몰아치면 어느새 영화는 끝이 나 있다. 간결한 세 글자의 제목만큼이나 영화의 퇴장도 명료하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한국영화 같지 않은 <엑시트>

<엑시트>는 한국 관객들에게 이젠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신파가 배제되어도 충분히 관객들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반증이며 진지한 재난상황에 웃음을 성공적으로 버무려낸  새로운 재난영화다.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매력은 <엑시트>에도 여실히 살아있고 꼭 맞는 캐릭터 옷을 입은 듯한 윤아의 연기도 눈에 띈다. 한국인이라면 주위에서 흔히 볼 법한 평범한 캐릭터들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숱하게 접한 것들을 결코 보여주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 <엑시트>는 올여름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영화이자 재난영화의 새로운 계보를 쓴 영화가 되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영화처럼 엑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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