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도 달린다
"선생님, 저는 기관사 할래요!"
제일 먼저 손을 든 건 주안이였다.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는 아이. 늘 앞장서고 싶어 하는 아이.
그 반대편엔, 팔짱을 낀 채 교탁 옆에 서 있는 지호가 있었다.
"저는 그냥… 기술팀 할래요."
짧고 조용한 한마디. 그 말 속에 숨어있는 '무대보다는 뒤쪽이 편해요'
조명 아래 서고 싶은 아이와, 조명을 비추고 싶은 아이.
아이들은 네 팀으로 나뉘었다.
배우팀은 당당했다. "우리야말로 공연의 얼굴이지."
조명팀은 계산 중이었다. "배우가 멋있으려면 우리가 조명을 잘 맞춰야 해."
기술팀은 노트북을 붙잡고 중얼거렸다. "기차 소리 안 나면 이건 그냥 정지된 사진이에요…"
소품팀은 손에 풀을 묻히며 말했다. "우린 아무도 몰라도 되는데, 그래도 우리가 없으면 기차는 못 달려요."
교실은 그날부터 하나의 작은 세상 같았다. 각자 자기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세상.
리허설 첫날, 배우팀이 목소리를 높였다.
"기차 소리가 너무 작아요! 우리 대사가 안 들려요!"
기술팀이 즉각 반박했다. "그건 조명이 너무 밝아서 관객이 우릴 보고 있어서 그래요!"
조명팀이 맞받았다. "그건 소품이 반짝거려서 그렇다고요!"
소품팀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어둡게 칠할게요."
순간, 모두가 멈췄다.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건 '반론'이 아니라 '양보'였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왜 이걸 못할까. 싸움을 끝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기는 게 아니라, 한 발 물러서는 것인데.
며칠 뒤, 주안이는 리허설 중 갑자기 멈춰 섰다.
"선생님, 기차 소리가 안 나요."
뒤를 돌아보니, 기술팀의 지호가 컴퓨터조작을 헤매고 있었다.
"잠깐만요… 죄송해요…"
주안이의 얼굴엔 초조함이 비쳤다. 무대는 멈췄고, 아이들은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때 지호가 말했다.
"제가 할게요."
"입으로?"
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칙칙폭폭."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소리가 리듬처럼 퍼졌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무대 위 배우들이 다시 움직였고, 교실은 다시 살아났다. 컴퓨터 소리보다 더 진짜 같은, 지호의 '칙칙폭폭'.
완벽한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멈추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막이 오르고, 배우팀은 무대 위에서 빛났다.
조명팀은 그 빛을 정확히 비췄고, 기술팀은 그림자 속에서 소리를 움직였고,
소품팀은 무대 위 작은 세계를 완성시켰다.
관객들은 무대만 봤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무대 뒤에서도 기차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막이 내리자, 시청각실에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 중간에 주안이와 지호가 마주 봤다.
주안이 말했다. "지호야, 너 없었으면 진짜 기차 못 갔다."
지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미안..."
"괜찮아~ 뒤에서 달렸잖아 반응 더 좋았어!."
다음 날, 지호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 다음엔 저도 배우팀 해볼까요?"
주안이 옆에서 말했다. "좋지! 대신 난 기술팀 할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게 진짜 멈추지 않는 기차야."
세상은 모두가 무대에 서려고 한다.
빛 아래 서고, 박수받고, 인정받으려고 한다.
무대 뒤에서도 누군가는 '칙칙폭폭' 하고 있어야 기차가 달린다는 것을.
그리고 진짜 멋진 건, 무대와 무대 뒤를 오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주안은 무대의 중심에서 겸손을 배웠고,
지호는 무대 뒤에서 존재의 힘을 배웠다.
진짜 공연은 무대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를 이해할 때, 비로소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